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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단 결성

의열단 결성

  • 4. 의열단 결성



    사명대사 유적지
    ▶창단배경과 경위

    ①3 ․ 1 운동 이후 만주지역 독립운동가들의 상황타개 의지와 실효성 있는 운동방향에 대한 나름의 모색 및 구상이 직접 동인으로 작용 ②무기구입, 재정확충, 군인양성 등의 문제로 군대조직의 어려움 ③이에 군사행동 노선을 유지하면서도 실행이 용이한 소수인원으로 기동성을 갖춘 급진적 방식의 무장투쟁방식 채택 ④1919년 2월 말, 만주․노령 방면 독립운동가 39인이 연명한 「대한독립선언서」에 “육탄혈전으로 독립을 완성”촉구 발표와 동시에 여준․조소앙․김좌진 등 길림 재류 독립운동가들이 대한독립의군부(大韓獨立義軍府)를 창설

  • ⑤3․1운동의 면사무소 파괴․직원 폭행 수준의 국지적 폭력은 목적의식적이기 보다는 우발적이었고, 그것을 전국적 차원으로 끌어올릴 만한 지도력의 결핍으로 인해 일제 통치권력 자체를 겨냥한 조직적 폭력투쟁으로 발전하지 못함 ⑥그리고 군대 조직과 운용에 소요될 인적․물적 자원이 충분히 확보 되지 못한 상황 ⑦이러한 현실적 난관을 자각한 위에서 당분간 독립군 무장투쟁을 대체하여 일제에 타격을 가하면서 무장투쟁의 기운도 고양시켜 갈 수 있을 긴급한 행동방책으로 새로이 구사된 것이 국내 방면의 작탄투쟁이며, 그 행동대 창설이 1919년 6월경부터 길림에서 추진되었고, 마침내 11월에 결실을 보게 된 것이 의열단 창립 ⑧의열단의 창립은 대한독립의군부의 후신조직으로 성립한 조선독립군정사(朝鮮獨立軍政司)의 기획작품이며, 재정책임자(회계과장) 황상규가 창단 준비 과정 주도함
  • ∎의열단 창립당시 조직원(10명)



    연번

    성 명
    이 명
    생 년
    출신지
    주요이력
    1
    김원봉

    若山()

    1898

    경남 밀양

    신흥무관학교 수학
    2
    곽재기

    郭敬

    1893
    충북 청주
    대동청년단원,길미소년단원
    3
    강세우
    1901
    함남 삼수
    신흥무관학교 수학
    4
    김상윤

    金玉, 金鈺

    1897
    경남 밀양
    신흥무관학교 수학
    5
    서상락

    徐永林,徐永潤(?)

    1893
    경북 달성
    신흥무관학교 수학
    6
    신철휴

    申愚童

    1898
    경북 고령
    신흥무관학교 수학
    7
    윤세주

    尹小龍

    1900
    경남 밀양
    밀양 만세시위 주도
    8
    이성우
    1899
    경남
    신흥무관학교 수학
    9
    이종암

    梁健浩

    1896
    경북 달성
    신흥무관학교 수학
    10
    한봉근
    1894
    경남 밀양
    신흥무관학교 수학


  • ∎의열단의 주요활동



    ▶ 활동연도 : 1920. 3~6

    곽재기∙이성우 등이 국내활동에 사용할 목적으로 밀양으로 폭탄을 반입하려한 의거로‘의열단 제1차 암살∙파괴 의거’ ‘밀양폭탄사건’‘진영사건’으로도 불린다. 1920년 봄부터 여름에 걸쳐 국내 일제기관 총공격을 위해 폭탄 16개와 권총을 동원하여 거사를 추진 중 기밀누설로 실행 실패.

    ▶활동연도 : 1920. 9. 14

    박재혁이 부산경찰서장 하시모토(橋本秀平)를 폭사시킨 의거


    ▶활동연도 : 1920. 12. 27

    최수봉이 밀양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의거 1920년, 밀양경찰서 투탄(최수봉이 실행 ; 폭탄 2발 사용 ; 청사 일부 파손)


    ▶활동연도 : 1921. 9. 12

    김익상이 조선총독부 비서과(불발), 회계과(폭발)에 폭탄을 던진 의거


    ▶활동연도 : 1922. 3. 28

    김익상∙이종암∙오성륜이 상하이 황포탄 부두에서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를 저격한 의거(폭탄 불발과 총탄 빗나감으로 암살 실패)


    ▶활동연도 : 1922.

    국내 부호들로부터 독립운동 자금 조달의 분위기 조성을 위한 일제기관 투탄거사 추진(미실행)


    ▶활동연도 : 1923. 1. 22

    김상옥의 종로경찰서 투탄의거(권총 3정, 실탄 500발, 살포용 격문 휴대)


    ▶활동연도 : 1923. 3.

    1923년, 김시현∙남정각∙유석현 등이 경기도 경찰부 황옥 경부를 동원하여, 무기와 폭탄을 국내로 반입하여 국내 일제기관 총공격을 재추진 한 의거로 의열단의 제2차 암살∙파괴 의거라고도 한다. 이 의거는 실행 직전 밀고로 인하여 좌절 되었고, 건조물 파괴용 대형 시한폭탄 6개 및 그 부속품인 시계 ․ 뇌관 각 6개, 방화용 소형 척탄 17개, 암살용 소형 척탄 13개, 권총 5정, 실탄 155발, 「조선혁명선언」360부, 「조선총독부 각 관공리에게」라는 제목의 경고문 550매가 압수 되었다.

    ▶활동연도 : 1923.

    만철(안봉선) 파괴 및 연변 교란, 무정부주의그룹과의 제휴에 의한 동경시내 대형 폭탄거사, 국내 대폭동 격발용 암살․파괴 거사의 동시 실행을 추진(폭탄 50개 준비 ; 관동대지진 발생 및 사전 발각으로 중도 좌절)

    ▶활동연도 : 1923.

    적기단(赤旗團)과의 합작에 의한 동경시내 폭탄거사를 추진(폭탄 300개 동원을 계획 ; 자금난으로 중도 좌절)


    ▶활동연도 : 1924. 1

    구여순∙문시환∙강홍열∙오세덕∙김정현 등이 계획한 암살∙파괴 의거로 의열단의 제3차 암살∙파괴 의거로 불린다.

    ▶활동연도 : 1924. 1. 5

    1923년 9월 1일 관동대지진 때 일제가 한인을 학살한 것에 대한 응징을 위해 1924년, 김지섭이 도쿄의 제국의회 습격을 기도했으나 휴회 중이어서 포기하고, 그 대신에 황궁 폭파를 목적으로 궁성 진입을 시도하였다. 하지만 경비병에게 저지를 당하자 황궁 정문 앞 니주바시(二重橋)에 폭탄 3개를 투척 하였다. 비록 3발 모두 불발에 그쳤으나 당시 일본이 받았던 충격은 그 어떤 폭탄의 위력보다 더 컸다.

    ▶활동연도 : 1925.

    일본내 거사 추진(단원 밀파했으나 거사실행 실패)


    ▶활동연도 : 1925. 3. 30

    이인홍과 이기환이 베이징에서 일제밀정 김달하를 처단한 의거


    ▶활동연도 : 1925. 11.

    이종암∙배중세∙고인덕∙한봉인 등이 국외로부터 무기를 반입하여 거사를 준비하였던 ‘경북 폭탄의거’


    ▶활동연도 : 1926. 12. 28

    ‘경북의열단사건’의 결심공판일이던 1926년 12월 28일, 의열단원 나석주의사가 서울 한복판 남대문 부근의 조선식산은행(朝鮮殖産銀行)동양척식회사 경성지점을 기습하여 폭탄 한 발씩을 던지고 경부보(警部補) 등 일인 7명을 총격 살상한 후 자결하였다. 자결직전 나석주는 가두의 군중에게 “우리 2천만 민중아! 나는 2천만 민중의 자유와 행복을 위하여 희생한다. 나는 조국의 자유를 위하여 분투하였다. 2천만 민중아! 분투하여 쉬지 말어라!” 라고 절규 하였다.


  • ▶의열단의 변화



    ▸1922년 의열단에 아나키스트∙사회주의자 등도 들어오면서 노선에 변화야기 ⇒ 1923년 1월 “조선혁명선언” 일명 “의열단선언”에 반영됨
    ▸의열단의 암살∙파괴운동 노선이 민중 무장투쟁 방식으로의 전환이유로는 ①암살∙파괴운동이 기대했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오히려 운동의 고립과 역량의 소진 ②국내 노농운동∙청년운동 등 부문운동과 사회주의운동의 발전과정에서 새로운 노선을 채택해야만 하는 상황전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