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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함성

그날의 함성

  • 2.그날의 함성



    사명대사 유적지
    ▶ 3 ∙ 1 만세운동의 배경

    1910년 8월 29일 일제가 우리나라의 주권을 강제로 빼앗은 전후
    침략에 항거하는 의병전쟁과 애국계몽운동을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강력한 무단정치 펼침
    민족고유문화의 말살, 경제적 침탈의 강화로 전체 조선민족의 생존에 심각한 위협을 가했다. 민족자본가 계급은 민족자본의 성장을 억제할 목적으로 실시된 회사령 會社令(1910)으로 큰 타격을 받았으며, 농민의 경우 토지조사사업(1910∼1918)으로 조상전래의 토지를 빼앗기고 빈농·소작농으로 전락, 극히 일부 지주층을 제외하고는 절박한 상황에 몰리게 됨.
    농지를 빼앗기고 도시로 흘러들어 자유노동자가 된 사람들은 일본인 노동자에 비해 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저임과 장시간 노동, 비인간적 대우, 민족차별 등으로 극악한 환경 속에서 살아감.

  • ⇒이처럼 식민통치 10년 동안 자본가·농민·노동자 등 모든 사회구성 계층이 식민통치의 피해를 직접적·구체적으로 입음으로써 그들의 정치·사회의식이 급격히 높아짐.

▶밀양의 3·1만세운동 현황과 내용


밀양의 3·1만세운동시위는 1919년 3월 13일 ~ 4월 10일까지 총8회가 일어남


부산지법
마산지청(11/20)

보안법 위반사건 수리자 461명
(1919. 6. 9 현재 부산지법 밀양지청 검사처분인원표)

3/13~4/10
기소후 공판회부
불기소
타청 송치
미종국
30명
407명
203명
1명
제1심 종국판결인원표
징 역 형
태 형
19명
8명
1년6월이상
5명
1년이상
2명
8월이상
1명
6월이상
8명
3월이상
3명




∎3월 13일 밀양면 만세운동



고종의 장례식을 보기 위해 서울에 갔다가 시위운동을 직접 체험하고 돌아온 윤치형∙윤세주 등이 을강 전홍표를 찾아가 서울에서 보고 들은 바를 보고하고 자문을 구한 뒤 시위준비에 들어감. 시위 시간은 오전 10시, 오후 1시, 오후 1시 30분 경 발생한 것으로 적고 있는데 철저한 준비과정을 생각해볼 때 오전 10시경부터 시위주도자들이 사전 준비를 하다가 1시경부터 본격적인 시위가 진행된 것으로 보임.

시위참가자 : 천여명

(하지만 1919년 당시 밀양의 인구가 109,903명으로, 이 중 일본 ․ 중국인을 제외하고도 108,000여명 이었다. 따라서 당시의 인구 규모와 장날의 규모로 볼 때 2~3천명이 참여 했을 것으로 연구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만세운동 주도자 판결(1919년 4월 14일 부산지방법원 밀양지청)

윤소룡(20세), 윤치형(27세) ⇒ 징역 1년 6월(궐석공판) 정동찬(22세), 김병환(30세), 김소지(22세), 박만수(23세), 이장수(23세), 최종관(21세), 박소종(23세) ⇒ 징역 6월 권재호(22세), 설만진(26세), 정동준(22세) ⇒ 징역 4월 윤보은(22세) ⇒ 징역 3월 김상득(19세), 박작지(23세), 엄청득(22세), 노재석(20세), 김상이(22세), 윤방우(24세), 양쾌술(24세) ⇒ 태(笞) 90도(度)


밀양면 만세운동은 일합사∙연무단 등의 비밀결사, 동화학교∙정진학교 등의 민족교육학교, 전홍표∙황상규 등의 항일 인사들의 항일독립의식 교육의 표출이며, 만세운동을 주도한 윤치형∙윤세주 등은 중국으로 망명하여 조선의열단을 결성하는 주체가 됨.


∎3월 14일 밀양공립 보통학교 학생만세운동


밀양공립보통학교의 만세운동은 13일 밀양면 만세운동의 한 대열이 태극기 등을 교실에 산포하면서 그것에 고무된 학생들에 의해 일어난 것. 3월 14일 밀양공립보통학교 학생 160여명은 직원들의 제지를 뚫고 거리로 뛰쳐나와 태극기를 흔들면서 독립만세를 부르며 행진했고 읍내 사람 약 2백 명이 여기에 호응.

∎밀양면 유림의 만세운동(3월 15일)


점필재 김종직 선생의 절의정신을 본받아 삶의 모범으로 삼았던 유생들이 밀양에서도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밀양 유림구락부(유림회)에서 긴급 모임을 비밀리 갖고 유림의 만세운동을 3월 15일을 시회(時會)날로 정하고 군내 각 유생에게 통첩하였다. 이날의 시회 장소는 밀양강변 솔밭광장으로 정하였는데 수천 명의 유생들이 모여 강시 혹은 고시강론을 하다가 일제히 일어나서 밀양거리로 나가 독립만세를 연창하며 시위행진을 하였다. 거리의 사람들이 여기에 호응하여 시위대열에 합류하여 만세군중이 삽시간에 5천명으로 늘어났다. 한편 기독교인 수백 명이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합세하여 갑자기 만세물결로 뒤덮이자 일제 경찰과 헌병은 총검을 휘두르고 소방대를 출동시켜 펌프로 물을 퍼붓는 등 군중을 해산시키고 주동자 체포에 혈안이 되었다. 이날 만세운동으로 유생과 기독교인 및 일반주민이 많이 검거되어 투옥되었다고 하나 자료가 없어 구체적 실상을 알 수 없지만 밀양 유림들이 주도했고 기독교인도 조직적으로 참가한 것으로 보인다.

∎3월 20일 밀양면 만세운동



3월 20일, 밀양의 덕망인사인 안희원(安禧遠)의 장례일로, 밀양은 물론 인근 지역에서도 많은 조문객들이 모여들었다. 오후 2시쯤 장례행렬이 시장 중심을 지날 무렵 상여소리가 갑자기 만세소리로 변하여 시위행렬로 변함. 일제 경찰과 헌병이 총출동하여 공포를 쏘고 소방대는 물을 퍼 붓는 등 군중을 해산시키고 유림 수십 인과 기독교인 5명을 검거함.


∎밀양소년단 만세운동(4월 2일)



밀양소년단은 밀양공립보통학교 졸업생, 재학생 등으로 조직된 비밀학생단체로 파악되지만 3.1운동 이전 구체적 실상은 알 수 없다. 밀양공립보통학교 졸업생인 윤차암(尹且岩, 1918년 제8회 졸업) ․ 윤수선(尹秀善, 1916년 제6회 졸업) ․ 김성선(金性善, 졸업생 명단에는 없음) ․ 박소수(朴小守, 1918년 제8회 졸업) ․ 강덕수(姜德秀, 1918년 제8회 졸업)는 1919년 4월 1일 아침 영남루 뒤 산에서 모였다. 이때 부산공립상업학교에 재학중인 윤수선이 부산에서 학생들이 조선독립을 위해 만세운동을 전개했다는 말에 고무되어 밀양에서도 조선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의하였다. 이들은 4월 2일 밤에 주로 밀양공립보통학교 학생 가운데 밀양소년단원들을 대상으로 시위계획을 세웠다. 4월 2일 저녁에 일어난 이날 만세운동은 학생을 중심으로 50여명이 참가하여 14명이 일제에 체포되었다.


∎단장 장날의 만세시위(4월 4일)



3월 20일경 양산의 통도사 승려 몇 명이 표충사를 방문하여 조선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계획하고 4월 4일 단장 장날을 만세시위운동일로 정하였다. 시위 예정일은 사명대사의 춘향일(春享日)이기도 하였다. 표충사 승려들은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만드는 한편, 부근의 절과 단장면 ․ 산내면 ․ 산외면 주민들에게 만세시위에 참여토록 독려하였다. 단장 장날인 4월 4일 12시 반경 농민 복장의 표충사 승려 7~8명이 ‘조선독립만세’라고 쓴 대나무 깃발을 시장 중앙에 세웠다. 나팔소리를 신호로 하여 구연운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군중들은 장터를 돌면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헌병주재소에 돌을 던졌다. 주재소가 부서지고 일본인 헌병군조 명화해차(名和海次)는 군중들에게 맞아 쓰러졌다. 헌병이 급파되고 경찰서 순사가 긴급 출동하여 발포를 하자 오후 2시쯤 군중들이 해산하였는데, 표충사 승려들이 주도하고 농민들이 참가한 단장면 만세운동은 지역운동으로는 대규모의 농민항쟁이었다.


∎4월 4일 단장면 표충사의 만세운동



-만해 한용운(韓龍雲)은 범어사와 통도사의 승려와 부속학교 학생들에게 만세운동을 지도함
-통도사 승려 5명은 3월 20일 표충사를 방문, 표충사 승려들과 만세운동 전개를 계획하고 4월 4일 단장면 태룡리 장날을 만세시위운동일로 정했는데, 이 날은 사명대사 춘향일 이기도 함.
-4월 4일 12시 30분경, 이장옥∙이찰수∙오학성 등은 4칸 길이의 죽간 끝에 ‘조선독립만세’라고 크게 쓴 기를 매달아 시장 중앙에 높이 세우고, 나팔소리를 신호로 구연운이 깃대 앞에 높이 서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 만세3창하자 수천 군중이 여기에 호응하여 독립만세를 외침.
-주재소가 부서지는 등 위기에 처하자 헌병과 경찰이 급파, 오후 2시쯤 군중들을 강제로 해산시킴.
이날 시위운동으로 364명이 검거되고 71명이 검사국으로 송치됨.


부산지법
마산지청(11/20)

이장옥
오학성/손영식
이찰수/김성흡
구연운/오응석
손종헌
징역5년
징역3년
징역1년
피신(옥고면함)
3개월 뒤 석방
대구 복심법원
(12/10)
 
 
징역2년
 
 


∎4월 6일 부북면 만세운동


-부북면 춘화리∙청운리∙덕곡리 주민들에 의해 일어난 만세운동. 평양에서 독립선언서를 입수해 가지고 돌아온 사립 계성학교 교장 김래봉은 김성수∙김응삼∙김영환∙김응진 등 문중사람들과 만세시위를 의논, 4월 6일 오후 12시에 춘화리에서 의거하기로 결정함.
-4월 6일 오후 12시쯤 5~6백 명의 농민들이 모인 가운데 김성수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군중들과 독립만세를 외침
-밀양헌병분견소 헌병들과 경찰들이 53명을 검거 했으나 농민들이라 전부 훈계 방면함. 김성수는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함.


∎청도면 인산리 만세운동(4월 10일)


-4월 10일 오후 10시쯤 50여명이 인산리(仁山里) 전단(田端) 광장에 모여 나팔소리를 신호로 시위운동을 전개했다. 시위대는 광산업을 하면서 모여 사는 일본인촌으로 몰려가 “너희들은 물러가라”고 크게 외쳤다. 일본인들은 전전긍긍하여 문을 잠그고 죽은 듯이 숨어 있었다. 군중들은 일본인 집에 돌을 던지면서 마을 광장으로 다시 돌아가서 조선독립만세를 부르고 해산하였다. 이 때가 한 밤중이고 경찰서도 멀리 있어 구 날 밤에는 경찰의 출동이 없었다.


▶3·1만세운동의 역사적 의의


-3·1운동이 근대민족 형성의 중요계기가 됐다고 보는 까닭은 3·1운동 당시 신분, 지역, 남녀노소를 뛰어넘어 모든 사람들이 운동에 동참했다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연대감, 동질성을 느끼게 되었다는 것을 들 수 있음. 운동에 참여한 사람은 동질성을 확보할 수 있었고, 거족적 봉기를 통해 같은 민족이라는 의식을 확산시키게 되는 계기가 됨.

-1920년대 양반들 머릿속에는 신분제가 남아있었지만 여론주도층과 언론에서는 그런 생각을 가지면 안 된다는 주장을 했고, 30년대 후반에 들어서는 신분의식도 거의 무너져가게 됨. 그런 점에서 3·1만세운동은 근대민족형성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음. 20세기 100년 역사를 볼 때 3·1운동만큼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전 민족이 동참한 사건은 찾아보기 어렵다.

특히 밀양의 3∙1운동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그 특징이 있음

첫째, 국외에서 활동하고 있던 밀양인사들을 의열단이라는 단일조직으로 결집시킴. 황상규∙김원봉∙윤세주 등 밀양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의열단은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폭력적 파괴를 중심으로 한 의열투쟁을 45년 해방 때까지 다양한 형태로 전개해서 민족해방운동에 큰 기여를 한 것. 둘째, 국내 민족해방운동이 군민 대다수가 참여할 수 있는 방향에서, 즉 청년∙학생∙노동∙농민∙교육∙종교 등 부문별로 전개될 수 있는 토양을 마련한 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