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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의 독립운동가

참고문헌: 최필숙(2017). 일제 강점기 미리벌의 분노와 희망. 밀양독립운동사연구소 

고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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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독립기념관 댓글 0건 조회 884회 작성일 18-09-26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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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인 덕(高 仁 德)

 

1887.11.3. ~ 1926.12.21.

내이동 1009

의열투쟁

독립장(1963)

 

고인덕 열사는 밀양장로교회를 설립한 고삼종(高三鍾) 목사의 둘째 아들로 밀양군 부내면 내이동에서 출생하였다. 1911년 대구 계성학교를 졸업한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일제가 우리강토를 강점하고 난 뒤 울분을 삼키다가 191811월경 고향을 떠나 상해·길림·안동 등지를 돌아다니며 조국의 독립에 대하여 고민을 하였다. 그 뒤 약산이 조직한 의열단의 단원이 되었으며, 선생의 부인 이복수도 밀양만세운동 때에 태극기를 만들어서 제공하는 등 안팎으로 독립운동에 온 힘을 기울였던 사람이다.

19209월 밀양으로 돌아온 선생은 국외 망명 시절 폭탄제조법을 배워두었고 제조기도 반입해두고 있었다. 19201227일에 있었던 최수봉 의사의 밀양경찰서폭탄의거 당시 폭탄을 제조해주어 가담하는 등 표면에 나서지 않고 의열단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1210일 오후 8시 경 부북면 출신 백희원과 함께 밀양장로교회에서 개최하는 밀양기독교청년회, 밀양청년회, 밀양여자청년회 등 3개 단체의 강연회에 참석,안락(安樂)의 본()은 고초(苦楚)에 있다는 연설을 한 것이 화근이 되어, 322일 밀양경찰폭탄사건으로 피체되는 동지들보다 먼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3년의 형을 언도받고 복역하던 중 지병으로 인하여 16개월만에 병보석으로 출옥하였다. 복역 중에 부친상을 당하였고, 본인 몫으로 상속된 유산을 처분해 3천원을 마련하여 의열단 자금으로 보내주었다. , 국외로 동지들을 파견할 때 여비가 없어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사실에 자신의 재산을 정리하여 3천원의 거금을 만들어 제공하였던 것이다 .

192511월경에는 이종암·배중세·한봉인 등 의열단원들과 함께 경북의열단 의거에 연루되어 구속되었다. 19251218일 대구 지방법원에서 징역 10월형을 구형받았다. 복역 중 일본 놈들의 갖은 악형과 고문이 심해 약병을 깨어 목을 찔러 자살을 기도하였으나 실패하고, 다시 두 손에 채워진 수갑으로 변기를 깨뜨려 그 파편으로 배를 그었다. 이로 인해 열이 높아져 옥중에서 절명하였으니, 19261221일 오후 8시라고 당시의 신문들은 전하였다.

1926127일 제1차 공판에서 선생은 이종암과 함께 수갑을 차고 죄수 삿갓을 덮어쓴 상태로 법정에 출두하였다. 그러나 19261218일 대구지방법원 제1호 법정에서 열린 2차 공판에는 병으로 인해 출석하지 못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 법정을 지켜보기 위해 밀양을 비롯한 각지에서 300여 명의 방청객이 기다렸다. 선생은 병이 완쾌되면 다시 공판을 한다는 것이었으나, 1221일 절명하므로 인해 1223일자 공판에서 공소기각판결이 내려졌다.

선생의 밀양 본가에는 부인 이복수(39)와 장남 용환(당시 12), 3남 종규(당시 3)와 딸 다섯이 있었다. 고인덕 열사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유족은 물론 밀양 청년 수십 명이 고인의 유해를 수습하였다.

부인 이복수와 친동생 금식(今植)의 애처로운 울음 소리가 멀리 하늘에 사무쳐 그의 친구들과 많은 밀양 사람들이 흐르는 눈물을 멈추기 어려웠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3년 독립장을 추서하였고, 선생의 유택은 동작동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모셔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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