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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의 독립운동가

참고문헌: 최필숙(2017). 일제 강점기 미리벌의 분노와 희망. 밀양독립운동사연구소 

권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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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독립기념관 댓글 0건 조회 763회 작성일 18-09-26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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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 재 호(權 在 好)

1898.5.21. ~ 1945.6.1.

내일동 547

3·1운동(3·13밀양만세의거)

대통령표창(1996)

 

권재호 선생은 밀양시 내일동 547번지에서 권성구(權性逑)의 장남으로 태어나 3·13밀양면만세운동에 앞장섰던 인물이다.

고종의 인산(33)에 참여하기 위해 서울에 갔다가 191931일 파고다공원 만세운동에 참여한 윤세주와 윤치형이 동화학교 교장을 지낸 전홍표 선생을 찾아가 서울에서의 만세시위 상황을 알렸다. 을강 선생의 지도를 받아 또래 동지들과 여성 기독교인을 규합하여 밀양에서도 독립만세 시위를 할 것을 의논하고 만세운동을 준비하였다.

을강 전홍표는 사립 동화학교 교장으로 역임하면서 밀양 지역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데 힘을 쏟았으므로 많은 청년들이 그를 따랐다. 그리하여 권재호·윤치영·윤세주·김병환·이장수·윤보은·김소지 등이 을강 선생의 지도 하에 만세운동을 계획하여 진행시켜 나갔다.

밀양면 사무소와 부북면 사무소의 등사판을 몰래 훔쳐내어 아북산으로 올라가 병풍을 둘러 불빛을 가리고 독립선언서 수천 매를 등사하였다. 그리고 김시악(백민 황상규의 부인이복수(고인덕의 부인), 김영수(전 예총밀양지부장 안영의 조모) 등 여성 기독교인들이 윤세주의 집에서 2~3일에 걸쳐 태극기 수백 매를 만들어 윤세주의 집과 밀양 장터 옆에서 쌀가게를 하는 김병환의 집에 숨겨두었다. 313(음력 212) 밀양 장날에 독립만세시위를 하기로 결정하고 인근 부락에 사는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에게 비밀리에 연락을 취하였다.

당일 시위 주동자들은 각기 준비된 물품을 품속에 숨기고 밀양공립보통학교 앞 밀양 장터에 모인 천여 명의 군중 속으로 파고들었다. 오후 130분경 조선독립만세라고 크게 쓴 기를 군중 속에 펼쳐 세우고 윤세주가 높은 곳에 올라서서 독립

선언서를 크게 읽는 동안 주동자들은 독립선언서를 재빨리 군중 속에 골고루 뿌리고 손에손에 태극기를 나누어주었다 .

독립선언서 낭독을 마친 윤세주가 두 손에 태극기를 움켜쥐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치자 특히, 권재호 선생은 독립만세라고 쓴 큰 기를 들고 선두에 서서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그 뒤를 이어 수천의 군중들이 태극기를 휘날리며 조선독립만세를 함께 외치니 밀양공립보통학교 앞 장터는 만세소리로 떠나갈 것만 같았다.

만세를 부르는 군중들로 인해 밀양 거리는 아수라장이 되어버렸고, 시위대 중 일부는 밀양공립보통학교로 들어가 운동장을 내달으며 뜨거운 만세 함성을 지르기도 하고 창문 너머 학생들에게 태극기를 전해주었다. 밀양에 주재하고 있던 10여 명의 헌병과 경찰병력이 총칼을 휘둘러도 해산시키지 못해 부산주둔헌병수비대 병력이 급파되어 가까스로 진압하였다. 군경의 무자비한 총칼 앞에 결국 시위대는 해산되고 만세시위 주모자들은 검거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연행되어 고문을 당하고 재판에 회부되었는데 1919414일 부산 지방법원 밀양지청에서 진행된 재판에서 권재호 선생은 보안법 위반의 죄목으로 징역4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9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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