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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의 독립운동가

참고문헌: 최필숙(2017). 일제 강점기 미리벌의 분노와 희망. 밀양독립운동사연구소 

김병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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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독립기념관 댓글 0건 조회 800회 작성일 18-09-26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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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병 환(金 鉼 煥)

1889.2.19. ~ 1947.1.16.

내이동 848

의열투쟁

애국장(1991)

김병환 선생은 1889219일 밀양시 내이동 848번에서 태어났으며, 미곡상을 경영하였다. 1919년 고종의 인산을 맞아 서울에 상경했던 윤치형과 윤세주의 제의에 의해 밀양에서도 만세운동이 계획되어 실행되었다. 이 당시 만들어진 독립선언서와 독립신문을 선생의 미곡상점에 보관하였으며, 313일 만세운동 당일 만세운동에 적극 가담하였다.

만세운동으로 주동자들이 검거되자 선생도 함께 연행되어 고문을 당하고 재판에 회부되었는데 1919414일 부산 지방법원 밀양지청에서 진행된 재판에서 보안법 위반의 죄목으로 징역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김병환 선생의 후배인 김원봉을 비롯하여 한봉근, 김상윤 등이 19191110일 길림에서 의열단을 창단하고 조선총독부 관료와 고관, 친일파 등을 처단하기 위하여 제1차 암살 파괴의거를 계획하였다. 동지들이 중국인으로부터 구입한 폭약과 탄

피로 상해 프랑스 조계 김대지 선생의 집에서 폭탄 3개를 만들어 19204월 중순 안동현과 신의주를 거쳐 밀양 김병환 선생의 미곡상회 앞으로 보냈다. 그러나 거사를 실행에 옮겨볼 틈도 없이 배신자의 밀고로 6월에 곽재기·황상규·이성우·윤세주 등이 서울 인사동에서 체포됨에 따라 김병환 선생도 이에 연루되어 78일에 검거되었다. 이 사건으로 1921621일 경성 지방법원에서 열린 재판에서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2차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2538일에 열린 밀양청년회 제10차 정기총회 시에는 임시의장을 맡아 사회를 보고 집행위원 겸 문화부장으로 선출되었다. 선생은 청년회의 규칙을 수정하고, 20~30세까지는 정회원으로, 30세 이상은 특별회원으로 할 것과 회관 수선문제를 결정했다. 56일에는 신진사상연구 및 소작운동을 지원하기 위한 오륙회(五六會)를 조직하였다. 1118일 열린 임시총회에서는 집행위원장을 맡았고, 밀양청년회와 밀양사회 내 여러 청년 단체들의 연합 기관으로 밀양청년동맹을 조직하였다.

1926년 밀양청년동맹활동에 매진하는 한편 의열단의 활동도 계속하였는데, 의열단 국내 공작원으로서 정보 수집과 연락 등 임무를 수행하던 중 경북의열단 의거에 연루되어 이종암·배중세·한봉인·고인덕 등과 함께 세 번째 검거되었다. 대구 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대구감옥에서 옥살이를 하다가 10월에 300원을 내고 보석으로 석방되었다.

19273월 황상규와 함께 밀양청년회의 신임 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고, 53일 황상규·박임수·박고지·이완희·정광호·이건희·윤세주·양태석·표문호·서재석·최창렬·윤치형·김희지 등과 함께 군청이전반대운동 위원의 한 사람으로 활동하였다.

192711월 밀양공립농잠학교 학생맹휴 사건이 있을 때에는 학부형회의 일원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활동했다.

신간회는 전국적으로 일부 자치운동 세력들이 조선총독부와 연계하려는 움직임에 맞서 타협적인 자치운동을 배격하고 절대독립론의 원칙 아래 비타협적인 정치투쟁을 전개하고 민족단일전선을 형성할 목적으로 19272월에 서울에서 조직된 단체이다. 이에 따라 밀양에서도 12191130분경 삼문동 밀양청년회관에서 윤치형의 사회로 신간회 밀양지회 개소식이 있었다. 16인의 창립위원 중 한 사람으로 참석한 김병환 선생은 부회장을 맡았고, 백민 황상규가 회장을 맡았다.

이후 황상규와 함께 신간회를 통해서 많은 활동을 해오던 선생은 1929128일 창립된 밀양차가인동맹 위원장으로 선임되어 차가인 구제방책을 고민하고, 세입자들의 집세 인하 방법과 이를 위한 구체적인 투쟁방법에 관해서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458·15 직후 좌익 계열인 안병희·윤수선·손주헌·김형달 등의 권유로 밀양인민위원회 위원장을 잠시 맡아서 활동하다가 194711657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장례는 밀양군 사회장으로 거행되었고 수천 명의 참례자가 모여 고인의 생애를 기리었다. 선생은 일제강점 시기 한 시도 밀양을 떠나지 않았고, 밀양에 거주하면서 의열단 의거에 가담하여 3회에 걸친 투옥도 견뎌내고, 밀양청년회와 청년동맹을 통한 사회계몽운동·차가인동맹이나 신간회 활동 등을 통해 끊임없이 일제에 맞서서 불꽃 같은 일생을 살았다.

선생의 묘소는 백민 선생의 묘소 옆 지동 입구 동회관 오른편 산록에 모셨는데, 2011년 후손들의 요청에 의거 대전 현충원 독립유공자묘역으로 이장되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91년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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