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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의 독립운동가

참고문헌: 최필숙(2017). 일제 강점기 미리벌의 분노와 희망. 밀양독립운동사연구소 

김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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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독립기념관 댓글 0건 조회 726회 작성일 18-09-26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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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상 이(金 尙 伊)

 

1898.1.2. ~ 1947.3.3.

내일동 64, 577(분가)

31운동(3·13밀양만세의거)

대통령표창(2003)

 

내일동 64번지에서 김명선의 삼남으로 태어난 김상이 선생은 약산 김원봉과 같은 마을의 동년배 친구로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으나 독립에 대한 의지가 강하여 만세의거 이후에는 의열단에 가입하고 민족혁명당 당원으로도 활동하였다.

고종의 인산에 참여하기 위해 상경하였다가 191931일 파고다공원 만세 현장에서 독립선언서를 획득하여 밀양으로 돌아온 윤세주와 윤치형이 동화학교 교장을 지낸 전홍표 선생을 찾아가 서울에서의 만세시위 상황을 설명하고 을강의 지도를 받아 김상이·설만진·윤방우·김상득·윤세주 등 또래의 동지들과 여성 기독교인을 규합하여 밀양에서도 독립만세시위를 할 것을 의논하고 만세운동을 준비하였다.

밀양면 사무소와 부북면 사무소의 등사판을 몰래 훔쳐내어 아북산으로 올라가 병풍으로 불빛을 가리고 독립선언서를 밤새워 수천 매 등사하였다. 그리고 김시악(백민 황상규의 부인이복수(고인덕의 부인), 김영수(전 예총밀양지부장 안영의 조모) 등 여성 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윤세주의 집에서 2~3일에 걸쳐 태극기를 수백 매 만들어 윤세주의 집과 밀양 시장 옆에서 쌀가게를 하는 김병환의 집에 숨겨두고, 313(음력212) 밀양 장날에 독립만세시위를 하기로 결정한 후 인근 부락에 사는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에게 비밀리에 알렸다.

당일 김상이 선생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은 각기 준비된 물품을 품속에 숨기고 밀양공립보통학교 앞 밀양 장터에 모인 천여 명의 군중 속으로 파고들었다. 오후 130분경 조선독립만세라고 크게 쓴 기를 군중 속에 펼쳐 세우고, 윤세주가 높은 곳에 올라서서 독립선언서를 크게 읽어 나가는 동안 김상이 선생 등 18명의 동지들과 여성 기독교인들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은 독립선언서를 재빨리 군중 속에 뿌리고 손에손에 태극기를 나누어 주었다.

윤세주가 독립선언서 낭독을 마치고 두 손에 태극기를 움켜 쥐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치자 중간 중간에 끼어 있던 동지들을 위시하여 수천의 군중들이 태극기를 휘날리며 조선독립만세를 함께 외치니 밀양공립보통학교 앞 장터는 삽시간에 만세 소리로 떠나갈 것만 같았다.

만세를 부르는 군중들은 앞장선 큰 깃발을 따라 거리를 누비며 시위행진을 하였는데 밀양 거리는 온통 만세 군중의 시위로 아수라장이 되어버렸고, 시위대 중 일부는 밀양공립보통학교로 들어가 만세 함성을 지르기도 했다.

밀양에 주재하고 있던 10여 명의 헌병과 경찰병력이 만세시위 군중을 해산시키기 위해 총칼을 휘둘렀으나 해산시키지 못하고, 부산 일본헌병수비대 병력이 급파되어 가까스로 진압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연행되어 고문 당하고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414일 부산 지방법원 밀양지청에서 진행된 재판에서 김상이 선생은 보안법 위반의 죄목으로 태 90도를 받았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200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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