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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의 독립운동가

참고문헌: 최필숙(2017). 일제 강점기 미리벌의 분노와 희망. 밀양독립운동사연구소 

김성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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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독립기념관 댓글 0건 조회 759회 작성일 18-09-26 13:58

본문

 

김 성 두(金 成 斗)

 

1885.8.15. ~ 1952.12.1.

삼랑진읍 용전리 288

의병항쟁(독립의군부)

애족장(1990)

 

김성두 선생은 밀양군 삼랑진면 용전리(龍田里)에서 김창일의 장남으로 1885815일에 출생하였는데, 본명은 김병두(金昞斗)이다. 체격이 장대하고 담력이 남다른 선생은 일본이 우리의 국권을 유린하는 것을 보고 민족 감정을 억누를 길이 없어 분연히 일어났다. 19079월에 경기도 양주로 가서 이강년 의병장 막하의 송재현 부대에서 모병 업무를 담당하고 의병 규합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일본군의 전세가 강해지자 만주로 망명 하였다.

선생은 191210월 통화현 합니하에서 부민단에 가담하고 국내로 잠입하여 동지 규합을 위해 필사의 활동을 하다가 19145월 고종의 비밀 칙령을 받아 대한독립의군부의 육군 정위 경상남도 소모관으로 임명되어 항일 투쟁을 전개하려 하였는데, 독립의군부의 조직 및 활동이 일제에 탐지되어 체포령이 내려지면서 1916년까지 강원도 통천에서 은둔생활을 하였다.

대한독립의군부는 19131월 의병장 최익현의 제자인 임병찬 등이 고종의 밀명을 받아 유림과 전 관료들을 모아 호남 지역에서 조직한 비밀결사체이다. 이 단체에는 임병찬을 비롯하여 13도 창의군을 이끌었던 허위, 그리고 이인영의 친족, 제자들이 주동하였다. 이 단체가 전국적 조직체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19145월 함경도 지역의 조직 확대 계획이 일제에 발각 되어 와해되고 말았다. 의병전쟁 계열이 중심이 된 독립의군부는 원칙은 무장투쟁을 표방하였으나, 무장투쟁보다는 이문제무(以文制武)라는 원칙 아래 독립환권(獨立換權)과 철병퇴거(撤兵退去)’를 내건 장서(長書) 투서 등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독립의군부 주도 세력들은 봉건질서로의 복귀나 왕조체제의 부활을 목표로 한 국권회복운동이라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일제로부터 국권을 회복할 경우 고종을 다시 복위시키겠다는 복벽주의의 성향이 강했다. 이즈음 국내에서는 공화주의적 사상이 싹트고 있었고, 이를 반영한 대표적인 단체가 대한광복회이다.

김성두 선생은 19174월 만주로 망명하였다가 국내로 잠입하여 19193·1운동이 일어나자 각지를 옮겨 다니며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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