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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의 독립운동가

참고문헌: 최필숙(2017). 일제 강점기 미리벌의 분노와 희망. 밀양독립운동사연구소 

김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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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독립기념관 댓글 0건 조회 1,049회 작성일 18-09-26 13:58

본문

 

김 성 수(金 聖 壽)

 

1900.7.13. ~ 1969.4.5.

부북면 춘화리 255

중국방면(의열투쟁)

독립장(1977)

 

김성수 선생은 1900713일 밀양군 부북면 춘화리에서 아버지 김응삼과 어머니 엄달초의 22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

선생은 중국으로 망명한 뒤에 호를 지강(之江)이라 하였고, 주열(朱烈) 또는 채천민(菜天民)이란 이명을 사용하였다.

19193, 계성학교 교장을 맡고 있던 김래봉(선생의 둘째 누나 남편)이 일이 있어 평양에 갔던 길에 독립선언서를 입수하여 왔다. 3·1만세운동의 민중 함성이 전국에 메아리쳤고, 3·13밀양만세운동을 비롯해서 44일 단장면 용회동만세운동도 있어 김래봉 교장은 장인인 김응삼과 그의 동생인 김응진(김성수의 삼촌), 김영환(김성수의 사촌), 김성수 등 문중 사람들과 46일 밤 12시에 춘화리에서 독립만세를 부를 것을 의논하였다. 이에 지강 김성수 선생은 약관 20세의 열혈청년으로서

이 거사의 주역을 맡았다. 계성학교 등사판을 이용하여 선언서를 등사하고, 학생들을 모아 비밀리에 태극기를 만들고, 춘화리와 청운리, 덕곡리 등 인접 지역에 비밀리 연락을 취하였다.

46일 자정쯤 춘화교회 앞에는 5~600여 명의 농민들로 가득 찼다. 김성수 선생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선창하자 모인 군중들이 일제히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니 만세 소리는 밤의 정적을 뚫고 밀양의 하늘로 퍼져 나갔다. 이어 시위

군중들은 징과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며 각 마을을 행진하였다.

일본 순사도 한밤중에 일어난 일이라 기겁하여 나오지 못했다. 여러 마을을 돌며 만세 시위를 한 군중들은 각 마을로 분산하여 마을 어귀에 모여 모닥불을 피워놓고 밤새도록 꽹과리··북을 울리면서 만세를 불렀다. 춘화리에는 단 한 사람 쇼쿠다(植田)라는 일본인이 살고 있었는데 선생은 쇼쿠다에게 너희들이 물러가지 않으면 이러한 만세운동이 다시 일어날 것이니 속히 물러가라고 강력하게 퇴거를 요구하였다.

다음 날 새벽 밀양 헌병분견소의 헌병들과 경찰이 출동하여 관련자 53명을 연행해 갔으나 검거된 사람들이 전부 농민들이라 훈계 방면되었다. 중심 역할을 한 사람들이 이미 피신하였으므로 사건이 일단락되면서 연행자들은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선생은 사건 직후 중국 망명길에 올랐다.

김성수 선생은 상해에서 약산 김원봉을 만나 의열단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30년 상해에서 류자명 등과 함께 남화한인청년연맹을 조직하고, 기관지 남화통신을 발간하였다. 1930년 김좌진 등과 한족총연합회를 조직해 활동을 하였으며, 1932년 상해사변 당시 중국 제19로군에 입대하여 일본군에 항전하였다. 193111, 만주에서 항일의용군을 조직하기 위해 대련으로 가려던 우당 이회영을 밀고하여 고문사하게 되자 선생을 비롯한 동지들이 일본 밀고자를 처단하기도 하였다.

1933317일 선생은 백정기·이강훈 등과 함께 주중 일본공사 아리요시 아키라(有吉明)를 폭살하려던 육삼정(六三亭, 중국 상해 탕구루 346, 1943년 화재로 소실) 의거와 5월 오면직·안경근 등과 함께 일본 영사관 밀정 이종홍 처단에 관련 되었다. 끈질긴 일본 경찰의 추적에 의해 1936년 상해에서 체포되어 황해도로 이송되었다. 1938년 해주 지방법원에서 두 사건으로 징역 18년 형을 언도받고 서울과 대전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8·15를 맞아 출옥하였다.

1963219일자 동아일보에 의하면 1961년부터 부산으로 내려와 셋방에서 지인(박기성 등)들의 도움으로 어렵게 생활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19635월부터 일제강점기 감옥에서 얻은 병으로 인해 피를 토하며 병석에 눕게 되었으나, 병원에 갈 형편이 되지 못한 설움이 기록되어 있다. 이 기사에는 해방 이후 출옥한 선생이 서울의 거리에서 애국운동가를 못살게 굴던 일경을 발견, 하수인을 시켜 그 중 셋(齊賀-사이가 시치로, 原田-츠보이, 坪井-하라다)을 권총으로 해치워 원한을 풀기도 했다 라는 내용도 눈에 띤다. 이 기사 속의 하수인이 차리혁(뒤에 차일혁으로 개명, 6·25전쟁 중 경찰에 투신하여 1953년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을 사살)이며, 일제강점기 사상경찰의 악마라 불렸던 사이가를 사살한 사람이 김두한이 아닌 차리혁 이라는 사실이 알려졌다. 다시 말하면 1945112일 오후 630분 서울 원남동 자택에서 총에 의해 죽은 사이가 시치로, 그 악명 높은 경찰을 처단한 것이 지강 선생의 지시였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이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77년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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