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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의 독립운동가

참고문헌: 최필숙(2017). 일제 강점기 미리벌의 분노와 희망. 밀양독립운동사연구소 

김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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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독립기념관 댓글 0건 조회 829회 작성일 18-09-26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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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소 지(金 小 池)

 

1898.11.7. ~ 1978.4.30.

내일동 555

3·1운동(3·13밀양만세의거)

대통령표창(1992)

 

약산 김원봉과 동년배인 김소지 선생은 1898년 밀양시 내일동 555번지에서 김덕곤의 아들로 태어났다. 밀양공립보통학교를 졸업(1914.3.25.)한 선생은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31일 파고다공원 만세 현장에서 독립선언서를 획득하여 밀양으로 돌아온 윤세주와 윤치형이 동화학교 교장을 지낸 전홍표 선생을 찾아가 서울에서의 만세 시위 상황을 설명 드리고 을강의 지도를 받아 김소지·김상이·설만진·윤방우·김상득·정동찬 등 또래의 동지들과 여성 기독교인을 규합하여 밀양에서도 독립만세시위를 할 것을 의논하고 만세운동 준비를 시작하였다.

밀양면 사무소와 부북면 사무소의 등사판을 밤에 몰래 훔쳐내어 아북산으로 올라가 병풍으로 불빛을 가리고 독립선언서를 밤새워가며 수천 매 등사하였다. 그리고 김시악(백민 황상규의 부인이복수(고인덕의 부인), 김영수(전 예총밀양지부장 안영의 조모) 등 여성 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윤세주의 집에서 2~3일에 걸쳐 태극기를 수백 매 만들어 윤세주의 집과 밀양 시장 옆에서 쌀가게를 하는 김병환의 집에 숨겨두었다. 313(음력 212) 밀양 장날에 독립만세시위를 하기로 결정한 뒤 인근 부락에 사는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에게 비밀리에 연락하였다.

당일 김소지 선생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각기 준비된 물품을 품속에 숨기고 밀양공립보통학교 앞 밀양 장터에 모인 천여 명의 군중 속으로 파고들었다. 오후 130분경 조선독립만세라고 크게 쓴 기를 군중 속에 펼쳐 세우고 윤세주가 높은 곳에 올라서서 독립선언서를 큰 소리로 읽는 동안 김소지 선생 등과 여성 기독교인들은 독립선언서를 재빨리 군중 속에 골고루 뿌리고 손에 손에 태극기를 나누어주었다.

윤세주가 독립선언서 낭독을 마치고 두 손에 태극기를 움켜쥐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치자 수천의 군중들이 태극기를 휘날리며 조선독립만세를 함께 외치니 밀양공립보통학교 앞 장터는 삽시간에 만세소리로 떠나갈 것만 같았다.

특히 선생은 나팔을 불며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만세를 부르는 군중들은 앞장선 큰 깃발을 따라 거리를 누비며 시위행진하자 밀양 거리는 만세 군중의 시위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시위대 중 일부는 밀양공립보통학교로 들어가 운동장을 내달으며 뜨거운 만세 함성을 지르기도 했다.

밀양에 주재하고 있던 10여 명의 헌병과 경찰병력이 총칼을 휘두르며 군중을 해산시키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부산 일본헌병수비대 병력이 급파되어 가까스로 진압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연행되어 고문을 당하고 재판에 회부 되었는데 1919414일 부산 지방법원 밀양지청에서 진행된 재판에서 김소지 선생은 보안법 위반의 죄목으로 징역 6개월을 언도 받고 복역하였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9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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