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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의 독립운동가

참고문헌: 최필숙(2017). 일제 강점기 미리벌의 분노와 희망. 밀양독립운동사연구소 

김원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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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독립기념관 댓글 0건 조회 881회 작성일 18-09-26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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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봉(金元鳳)

1898. 3. 14. ~ 미상

• 내이동 901

아호는 약산(若山)이고, 중국에서는 진국빈(陳國斌) 등의 가명도 썼다.

1898년 음력 314일 밀양군 노하동(현 밀양시 내이동) 901번지에서 김주익의 9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10

년 밀양공립보통학교 재학 중 일장기 모독 의거를 벌여 퇴학당하고 을강 전홍표가 교장인 동화학교를 거쳐 서울의

중앙학교와 중국 천진의 덕화학당 등에서 수학했다.

 

1919년 만주 길림으로 가서 조선독립군정사 간부인 고모부 황상규의 지도대로 유하현 고산자의 신흥무관학교에 들어가

 배우면서 동지들을 규합하고, 졸업 후 길림으로 데리고 가 1110일 의열단을 창립하고 단장이 되었다. 그로부터

 1926년까지 사이에 상해·북경·천진 등지에 거점을 두고 세 차례 추동한 국내 적기관 일제공격 거사를 비롯하여 23차례

의 크고 작은 대일거사를 의열단이 기획하고 벌여나간 과정을 총지휘하였다.


1926년 의열단의 노선을 군사·정치운동으로 전환시키면서 단원들과 함께 광동성 광주의 황포군관학교에 들어가 수학했

. 그 경험을 바탕으로 1929년 북경에서 레닌주의정치학교를, 1932년에는 남경에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이 되고, 150명의 항일투사 겸 장래의 민족간부를 양성해냈다.


193575일 남경에서 국외지역 9개 독립운동단체들의 일대 통합체로 민족혁명당이 창립됨을 주도하여 의열단을

 해체하고, 당 서기부장을 거쳐 총서기가 되어 실권을 쥐었다. 중일전쟁 발발 1년 후인 193810월 무한에서 중국관내

 최초의 한인부대인 조선의용대를 창설하여 총대장이 되었고, 그 후로 중국군의 대일항전을 지원하면서 대적선전공작

에서 성과를 올려갔다. 1941년 조선의용대 병력의 상당수를 북상시켜 화북지역에서 대일작전을 벌여가도록

했으며, 화중·화남지역의 잔여 부대원을 한국광복군 제1지대로 재편하고 광복군 부사령 겸 1지대장이 되었다.

임시의정원 의원을 거쳐 1944년에는 임시정부 국무위원 겸 군무부장으로 선임되었다.


조국과 고향을 떠난 지 29년 만인 1945, 8.15 해방을 맞으니 부인 박차정의 유골을 안고 122일에 환국하였다.

그 후 통일독립국가 건설을 위해 진력하다 미군정의 탄압이 심해지자 1948년경 북으로 갔고, 언제 생을 마쳤는지는

미상이다독립유공자로 서훈 받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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