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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의 독립운동가

참고문헌: 최필숙(2017). 일제 강점기 미리벌의 분노와 희망. 밀양독립운동사연구소 

한봉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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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독립기념관 댓글 0건 조회 458회 작성일 18-09-26 11:55

본문

한 봉 삼(韓 鳳 三)

 

1908.10.2. ~ 1933.8.6.

밀양시 가곡동 557

국내항일(노동운동)

애족장(2002)

 

한봉삼 선생은 밀양면 가곡동 557번지에서 한춘서(韓春瑞)31녀 중 막내로 태어났으며, 위로 봉근·봉인 두 형님과 인숙(仁淑) 누나가 있다. 19287월 경성공립제일고등보통학교 3학년 재학 중 독립운동에 관련되어 퇴학을 당하였다. 19294월 일본 오카야마(岡山) 관서중학교 4학년에 편입학하였으나 역시 반일사상 문제로 19303월 다시 퇴학을 당하였다.

이즈음 밀양에서는 김병환황상규윤치형윤세주 등 밀양 지역의 선배들이 이끌던 밀양청년회가 해체되고 1928729밀양청년동맹이 설립되어 활동하고 있었다. 193049일 밀양청년동맹 밀양면 지부의 제6회 정기총회에서 맹원 모집지체 교양등 주요 의안이 토의되었고 내부 진용을 한층 공고히 하기 위해 지부를 설치하였다. 7삼랑진면 낙동지부밀양역전 지부산외면 지부3개 지부가 설치될 때 한봉삼 선생은 밀양역전 지부 회원으로 가입하여 청년동맹 활동에 참여하였다.

914일 청년동맹 회관에서 있었던 대표자 대회에서 안영달의 사회로 3총해금 소년문제무산 아동 교육기관 후원회 조직위원장(安炳旭) 사임맹원 제명 문제 등을 토의한 후 대대적인 임원 개선을 단행할 때 선생은 본부 소년부 상무의 직책을 맡았다.

노동운동과 야학사업으로 저항했던 밀양의 사회운동은 193110월경부터 1932년 초반까지 몰아친 일제의 검거 선풍으로 밀양청년동맹의 집행 위원들이 상당수 검거되면서 세력이 약화되었다. 한봉삼 선생도 19318월 초부터 10월 사이에 밀양합동노동조합 내부에서 정선호박재석박경수김용학김희순 등과 함께 사회과학연구회라는 비밀결사체를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박경수김용학김희순 등 간부 3인과 함께 검거되고 가택 수색을 당했다.

1125일 부산지방법원 밀양지청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모두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3년을 받고 풀려 나왔다. 하지만 이후에도 검거 선풍은 계속되었고 박경수윤치경김희순김용학 등은 19322월에 다시 검거되었다.

청년동맹의 정상적인 활동이 어렵게 되자 선생은 안영달 손주헌 등과 함께 유무산계급의 격차가 날로 심각해지질 것이라 생각하고 지하로 들어가 사회주의 운동에 진력하였다. 그리고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고 일제의 만주 출병을 저지시키기 위한 반전활동에 주력하게 되었다. 반전격문을 제작하여 대구에서 배포하던 중 193211월 대구에서 체포되었다. 대구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출판법 위반보안법 위반등의 죄목으로 징역 16월형을 선고받았다. 전에 받았던 징역 10월에 3년의 형집행유예가 취소되어 징역 10월형이 추가되었다.

이후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일제의 심문 및 조사과정에서 당했던 심한 고문으로 온 몸이 망가져 거동도 제대로 못하여 형 집행이 정지되었고, 자택에서 요양 중 병이 깊어 193386일에 순국하고 말았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2002년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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