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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의 독립운동가

참고문헌: 최필숙(2017). 일제 강점기 미리벌의 분노와 희망. 밀양독립운동사연구소 

김홍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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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독립기념관 댓글 0건 조회 595회 작성일 18-09-26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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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홍 규(金 弘 圭)

 

1889.12.15 ~ 1951.10.15.

단장면 사연리 1078

국내항일(신민부군자금모집)

애족장(2006)

 

김홍규(金弘圭) 선생은 18891225일 밀양군 단장면 사연리 1078번지에서 아버지 김만두(金萬斗)와 어머니 최대년(崔大年) 여사의 슬하 42녀 중 4남으로 태어났다. 마을 서당에서 한문을 공부하고 일찍이 분가하여 농사일에 종사하고 있었는데, 1910년 한일병탄으로 나라가 일제에 강점되자 항상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는 의분에 쌓인 생활을 하고 있었다.

191944일 오후 1230분경에는 이장옥·이찰수·오학성·손영식·김성흡·김경오·이준호 등 표충사 승려와 단장면 유지 이강조가 중심이 되어 약 5천 명의 군중이 단장면 태룡의 장터에서 만세운동을 할 당시 선생도 이 만세시위에 참가했다 .

단장면 만세시위 이후 신분상의 불안감과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던 선생은 19195월 간도로 망명의 길을 떠나게 되었다.

마침 북간도 무송 지역에서 대종교 포교와 교육사업을 통해서 줄기차게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밀양 부북면 출신 선배인 단애 윤세복 선생을 만나 대종교를 신봉하였고, 늦은 나이에도 민족의식 교육과 한글도 학습하며 대한국민단의 일원으로 독

립운동에 가담하였다.

1923년부터는 고향을 오가며 단애 선생으로부터 받은 특별 임무를 수행해 오던 선생은 19253월 대종교 교인들이 중심이 된 대한독립군단, 대한독립군정사를 주축으로 한 북만주 지역의 독립운동단체들이 효과적인 항일투쟁을 위하여 통합을 추진하여 북만주의 영안현에서 결성된 단체인 신민부에 가담하게 되었다.

19274월 일찍이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끈 신민부 중앙집행위원장 백야 김좌진 장군으로부터 일제 고관과 친일분자의 주살, 주요 시설의 폭파, 군자금 모집 등의 밀명을 받고 <신민부> 단원으로 윤세용의 사위인 이병묵, 동향인인 손호, 윤창선, 동지 손량윤, 신현규 등과 함께 국내에서 독립군 자금을 모금 하였다.

192711월 초순 선생의 먼 친척이자 손봉현의 장인인 밀양군 단장면 사연리에 살고 있던 부호 김태진으로부터 군자금 3,000원을 받아내고 그의 아들 김용출을 포섭하여 북간도로 데려가 대종교인으로 만들려는 임무를 수행 중 일제에 발각되어

1928819일 종로경찰서에서 대정 8년 제령 제7호 위반등의 혐의로 체포되었고, 2년의 실형이 선고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1931년 형기를 마치고 출감하였으나 고향 사연리에서 오랜기간 동안 요양할 수밖에 없었다.

1935년 윤세복 선생을 찾아가 해방이 될 때까지 독립운동을 위해 자금을 모집하는 일에 전념하였고, 1940년 봄 둘째 아들 내외와 손자(英淵, 英姬) 등을 북간도로 이주시켜 안정적인 활동 장소를 마련하고자 했다. 둘째 아들의 자손들이 중국 길림성 교하시 오림향 태평촌에서 지금까지도 살고 있다 .

해방 이후 몽양 여운형 선생을 흠모하여 스스로 비서의 일원이라 자처하며 몽양의 측근에서 보필하다가 1947719일 몽양 선생이 저격을 당해 유명을 달리하자 실의에 빠졌고, 고문 후유증이 겹쳐 오랜 신고(身故) 끝에 19511015일 고향

집에서 운명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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