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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의 독립운동가

참고문헌: 최필숙(2017). 일제 강점기 미리벌의 분노와 희망. 밀양독립운동사연구소 

노상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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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독립기념관 댓글 0건 조회 573회 작성일 18-09-26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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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상 직(盧 相 稷)

 

1855.11.21. ~ 1931.1.30. 

단장면 무릉리 354

31운동(파리장서서명)

건국포장(2003)

 

선생의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치팔(致八), 호는 소눌(小訥) 또는 눌인(訥人)이라 하였고, 18851121일 김해군 생림면 금곡(金谷)에서 출생하였다. 성재 허전의 문인으로, 성품이 온화하고 재주가 탁월하였으며 독학으로 학문에 증진하여 대학자

의 경지에까지 도달하였다. 선생은 나라의 부름도 있었으나 혼란한 정국이라 사양하고 유학 연구에만 온 힘을 쏟아 많은 후진을 양성하였다. 일찍이 중국으로 망명한 경재 이건승을 비롯한 우국지사들과 동족을 지도하며 국권회복의 방법을 모색하

2년여의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한 이후 밀양에 정착하였다.

밀양 단장면 무릉리에서 사연서당·자암서당을 열어 후학을 양성하던 중에 1919년 파리장서 서명에 참여하게 되었다. 선생이 참여하였던 파리장서운동 또는 제1차 유림단운동이라는 것은 영남의 거유 면우 곽종석이 19193월에 일어난 3·1운동이 천도교·기독교·불교계 지도자들의 연합에 의해서 진행되어 유교가 참여하지 못했던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유림들도 독자적으로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해야겠다는 생각으로 호서 유림 김복한과 협력하여 전국의 유림단 명의로 파리강화회의에 조선의 독립을 요구하는 서한을 발송한 것이다.

전국의 유생 137명이 서명한 파리장서는 일제가 자행한 명성황후, 광무황제의 시해와 한국 주권의 찬탈 과정을 폭로하고 한국 독립의 정당성과 당위성을 주장하는 요지였는데, 경북 성주 출신 심산 김창숙이 중국 상하이로 가지고 가 파리강화회의에 우리나라 대표로 참석하는 김규식으로 하여금 제출토록 하였다. 이 일이 국제 사회에 한국의 독립 의지를 알리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 파리장서는 국내의 각 향교에도 우송되어 유림계의 각성을 촉구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유림단의 독립운동은 김창숙의 고향인 경북 성주에서 1919414일 일어난 만세운동과 관련하여 서명자의 한 사람이 체포되면서 발각되었다.

소눌 선생은 안효진·유진옥 등과 밀의하여 제1차로 유림단의 파리장서에 서명하였는데, 밀양 출신 유림으로 파리장서에 서명한 사람들은 주로 노상직 선생의 문하에서 공부하고 있던 제자들이었다.

소눌 선생은 밀양은 물론 김해 지방의 유림 사회를 이끌던 지도적 인물로서 파리장서에 밀양과 김해 유림이 참석하는데 중심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독립운동과 관련해서는 유림의 제1차 파리장서운동에 이어 제2차 파리장서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 조선독립 청원운동에도 참여했고, 독립군자금 모금에도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이로 인해 헌병대에 구금되어 고초를 겪다가 병보석으로 출감했고, 여생을 밀양에서 보내다가 77세 되던 해에 마산에서 별세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2003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소눌선생문집책판이라는 이름으로 문집이 만들어져 경상남도 유형문화제 제176호로 지정되어 밀양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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