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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의 독립운동가

참고문헌: 최필숙(2017). 일제 강점기 미리벌의 분노와 희망. 밀양독립운동사연구소 

노상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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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독립기념관 댓글 0건 조회 571회 작성일 18-09-26 13:22

본문

대눌 노상익(盧相益)

 

1849. 11. 12. ~ 1941. 9. 16.

단장면 무릉리 354

만주방면

대통령표창(2017)

 

대눌(大訥) 노상익(盧相益)1849년 지금의 김해시 한림면 금곡에서 극재공 노필연의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동생 소눌(小訥) 노상직(盧相稷)과 당시 김해부사인 성재 허전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익혔다.

34세 되던 1882년 별시 문과에 을과 제일인(第一人)으로 급제하여 이듬해 권지홍문원부정자로 벼슬길에 나아갔으며, 1884년 성균관 전적과 사헌부 지평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같은 해 4월 부친상을, 그 이듬해에는 모부인의 상을 당하여 복을 마치고, 또 그 다음해는 스승인 성재 허전이 세상을 떠났다. 잇달아 부모와 스승을 잃은 대눌은 큰 슬픔에 잠겼다. 이후 1892년에 다시 사헌부 장령과 전적의 직책을 맡아 조정에서 봉직하다 1894년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온 뒤 아우인 소눌이 후학들을 가르치던 자암서당(紫岩書堂)이 있는 지금의 밀양시 단장면 노곡리로 이사를 하였다.

57세 되던 5월 홍문관 시강에 다시 임용되었으나 경연이 오래 열리지 않자 상소를 올리고 물러났다.

19107월에 순종이 퇴위하고 나라가 망하자 울분을 이기지 못하던 차에 11월에 이른바 일왕의 사은금(恩賜金)’을 강제로 수령하게 하자 대눌은 단호히 거절하였다. 이일로 대눌은 태룡동 파견소에 일시 구금된 뒤 풀려났는데, 15일에 다시 영남루에 압송되어 사흘만에 풀려났으나 이후 헌병의 감시를 받게 되었다.

일제라는 원수와 한 하늘밑에서 살수 없다는 결연한 의지로 1911년 중국 봉천성(奉天省) 안동현(安東縣) 접리수(接梨樹) 서구(西溝)로 이주하여 안효제(安孝濟) 등과 한인촌을 설립·운영하였다.

191311월에는 동삼성 한인공교회(東三省 韓人孔敎會, 회장 이승희 李承熙) 발기인으로 이주한인의 권익 향상과 전통 계승에 앞장서고, 1910년대 중·후반 독립운동가들과 자주 접촉하였으며, 일제에 안동현(安東縣)의 주요 항일운동 지도자로 지목되었다.

만주 체류 시기에 통사절요 通史節要(일명 한사절요 韓史節要), 동역고 東域考, 동제고략 東制考略등 한국 역사·영토·제도에 관한 다수의 저술을 남겼다.

성재 허전의 제자로 동생 노상직과 더불어 당시 영남학파를 주도하였으며, 홍문관 시강(侍講)의 벼슬을 하다 을사늑약 후 일제에 항거하다 나라가 망하자 망국의 한을 안고 중국으로 건너갔던 노상익은 평생을 어렵게 살면서도 우국충정의 마음을 견지하며 항일투쟁에 앞장섰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2017815일 대통령표창을 추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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