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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의 독립운동가

참고문헌: 최필숙(2017). 일제 강점기 미리벌의 분노와 희망. 밀양독립운동사연구소 

박봉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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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독립기념관 댓글 0건 조회 496회 작성일 18-09-26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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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봉 하(朴 鳳 夏)

 

1884. ~ ?

산내면 원서리

3·1운동(단장 용회동만세의거)

대통령표창(2016)

 

박권하 선생은 밀양시 산내면 원서리에서 태어나 191944일 밀양군 단장면 태룡리에 있는 용회동 장터 만세운동에 참가한 사람이다. 일명 태룡장터만세운동이라 불리던 이 용회동장터만세운동3·1운동 당시 민족 대표였던 한용운의 지도로 일어난 만세운동이었다. , 민족 대표 중의 한 사람인 한용운이 경성불교 중앙학교 학생 오택언과 지용준을 통도사로 내려보내 시위운동을 주도하게 했다.

이에 통도사 승려 5명이 320일 표충사를 방문하여 조선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계획하고 44일 단장면 태룡리 용회동 장터에서 장이 열리는 날 만세시위 운동을 할 것을 결정하였다.

음력으로 34일인 44일은 용회동에서 시장이 열리기도 했지만 사명대사의 춘향일이기도 하여 표충사 근처 주민은 축제일 같은 분위기에 젖는 날이기도 하였다.

표충사 승려들이 독립선언서를 등사하고 태극기를 만들어 시위 준비를 하면서 인근 사찰과 단장면·산내면·산외면 등지에도 시위운동 계획을 비밀리에 알렸다. 이장옥은 법무계 서기 김종석에게 선서라는 제목의 취지문을 수백 장 등사하게 했다.

박봉하 선생은 원서리 주민을 독려하며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장날이 되자 장터에는 아침 일찍부터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이장옥·이찰수·오학성·손영식·김성흡·구연운·오응석 등 시위 주도 승려들은 민간복으로 변장하고 각자 준비물을 감추어 장꾼 속에 숨어 장터에 들어왔다. 그리고 미리 연락해 두었던 학생 50여 명에게 독립선언서와 태극기 등을 배포하도록 하였다. 정오쯤 5천여 명의 남녀노소가 장터에 모여들자, 1230분경 표충사 승려들이 죽간 끝에 조선독립만세라고 크게 쓴 기를 매달아 시장 중앙에 높이 세웠다. 나팔 소리를 신호로 구연운이 깃대 앞에 높이서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일본의 침략 행위를 규탄하였다. 이어 독립만세를 삼창하자 수천 군중이 호응하여 독립만세를 외쳤다.

앞에서 행진하는 승려들을 따라 군중들은 장터를 세 바퀴 정도 돌며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하였다.

헌병과 경찰이 해산을 강요하자 시위 군중은 헌병주재소를 포위하고 돌을 던져 주재소를 부숴버렸고 헌병군조 명화해차(名和海次)마저 짓밟아 버렸다. 이즈음 밀양 헌병분견소로부터 헌병이 증파되고 경찰서 순사가 출동하여 발포하자 오후 2시경 시위 군중들은 강제로 해산되었다.

표충사 승려들이 주도하고 농민들이 참가한 단장면 태룡리 용회동장터만세운동은 지역운동으로는 대규모의 농민항쟁이었다. 시위 주도자들은 민족 대표의 최후의 신탁을 배반하지 말아야 한다.’는 격문을 배포하면서 헌병주재소를 파괴하고 일본헌병을 때려눕히는 등 농촌의 전형적인 폭력투쟁으로 발전한 모습을 보였다.

이날 만세운동으로 364명이 검거되고 71명이 검사국으로 송치되었는데 19191120일 부산 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열린 재판에서 박봉하 선생은 보안법 위반 및 소요죄로 태 90도를 선고받았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201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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