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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의 독립운동가

참고문헌: 최필숙(2017). 일제 강점기 미리벌의 분노와 희망. 밀양독립운동사연구소 

박상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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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독립기념관 댓글 0건 조회 564회 작성일 18-09-26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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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상 윤(朴 尙 允)

 

1881.7.20. ~ 1938.9.12.

부북면 청운리 282번지

3·1운동(파리장서서명)

건국포장(2005)

 

박상윤 선생은 본관이 밀성으로, 자는 화국(華國), 호는 경재(絅齋)이다. 1881720일 밀양군 부북면 청운리에서 부친 박경수의 2남으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재기가 뛰어났고 진퇴에 법도가 있어서 항상 문중 부로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고 한다, 장성해서도 학문에 몰두하여 농사일 중에도 항상 고서를 허리에 끼고 공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선생이 참여하였던 파리장서운동 또는 제1차 유림단운동이라는 것은 영남의 거유 면우 곽종석이 19193월에 일어난 3·1운동이 천도교, 기독교, 불교계 지도자들의 연합에 의해서 진행되었고, 유교가 참여하지 못했던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유림들도 독자적으로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호서 유림 김복한과 협력하여 전국의 유림단 명의로 파리강화회의에 조선의 독립을 요구하는 서한을 발송한 것을 말한다.

전국의 유생 137명이 서명한 파리장서의 요지는 일제가 자행한 명성황후, 광무황제의 시해와 한국 주권의 찬탈 과정을 폭로하고 한국독립의 정당성과 당위성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이를 경북 성주 출신 선각자 심산 김창숙이 중국 상하이로 가지고 가 파리강화회의에 우리나라 대표로 참석하는 김규식으로 하여금 제출토록 하였다. 이 일은 국제사회에 한국의 독립 의지를 알리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 장서는 국내의 각 향교에도 우송되어 유림계의 각성을 촉구하는 계기가 되었다. 유림단의 독립운동은 김창숙의 고향인 경북 성주에서 1919414일 일어난 만세운동과 관련하여 서명자의 한 사람이 체포되면서 발각되었다.

밀양 출신 유림으로서 유림단 파리장서에 서명한 인물은 노상직을 비롯해서 주로 노상직 문하에서 공부하고 있던 제자들이 중심이었는데, 그 중 허평(단장면박상윤(부북면이학규(삼랑진안종달(산외면손상현(산외면강신혁(부북면김태린(청도면) 등 모두 8명이 확인되고 있다. 이 일로 인해서 많은 이들이 밀양 헌병대에 체포되어 많은 고초를 겪었다 .

이들 8인의 유학자에 대한 자세한 자료는 거의 없는 형편이다 .

박상윤 선생의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도 밝혀진 바가 없어서 앞으로 더 많은 조사가 있어야 하겠으나 후손들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59세가 되던 1938911일 밤에 두 사람의 부축을 받고 쇠퇴해진 몸으로 귀가한 선생은 몸도 제대로 가누지를 못하는 상태였다가 익일인 912일에 자택에서 별세하였다고 한다.

선생이 작고하자 일경들은 밀양·합천·창녕·산청 등 원근 각지에서 방문한 문상객들의 문상은 고사하고 가족들의 자유로운 접근마저도 금지하는 등 행패를 부렸다. 사망 후 3일만에 자택 옆 밭에 가매장을 하게 하고는 약 6개월에 걸쳐 아침저녁으로 감시를 했다. 이후에도 가족에 대한 감시와 탄압이 끊이질 않았고, 결국 선생의 유해는 해방 후에야 선산에 천장할 수 있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2005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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