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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의 독립운동가

참고문헌: 최필숙(2017). 일제 강점기 미리벌의 분노와 희망. 밀양독립운동사연구소 

반봉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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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독립기념관 댓글 0건 조회 502회 작성일 18-09-26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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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봉 출(潘 鳳 出)

 

1901.2.8. ~ 1950.10.28.

단장면 미촌리 475

3·1운동(단장 용회동만세의거)

대통령표창(2015)

 

반봉출 선생은 단장면 미촌리 475번지에서 반규하의 차남으로 태어나 191944일 단장면 태룡리에 있던 용회동 장터만세운동에 참가한 사람이다. 일명태룡장터만세운동이라 불리던 이 용회동장터만세운동3·1운동 당시 민족 대표였던 한용운의 간접적인 영향을 받고 추진되었다. 한용운은 경성불교 중앙학교 학생 오택언과 지용준을 통도사로 보내 시위운동을 주도하게 했다.

320, 통도사 승려 5명이 표충사를 방문하여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면서 44일 단장면 태룡리 장터에서 장날이 열리는 날 만세시위운동을 할 것을 결정하였는데, 이날은 사명당의 춘향일이라 사람들이 더 많이 모일 것이라 예상하였다.

승려들은 독립선언서를 등사하고 태극기를 만들어 시위 준비를 하면서 인근 사찰과 단장면·산내면·산외면 등에 시위운동 계획을 비밀리에 알렸다. 이장옥은 법무계 서기 김종석에게선서라는 제목의 취지문을 수백 장 등사하게 했다.

반봉출 선생은 같은 마을에 사는 이강조로부터 44일 용회장에 미촌리 주민들이 많이 모이도록 독려하라는 부탁을 받고 형인 반봉갑과 함께 주민들에게 이런 사실을 통보하였다. 이장옥·이찰수·오학성·손영식·김성흡·구연운·오응석등 시위 주도 승려들은 민간복으로 변장하고 각기 준비물을 감추어 장꾼 속에 숨어 장터로 들어왔다. 미리 연락해 두었던 학생 50여 명은 독립선언서와 태극기 등을 배포하였다. 정오쯤 5천여 명의 남녀노소가 장터에 모여들자 1230분 표충사 승려들이 죽간 끝에 조선독립만세라고 크게 쓴 기를 매달아 시장 중앙에 높이 세웠다. 나팔 소리를 신호로 구연운이 깃대 앞에 높이서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일본의 침략 행위를 규탄하였다. 이어 독립만세를 삼창하자 수천 군중이 호응하여 독립만세를 외쳤다.

큰 기를 펼쳐들고 앞에서 행진하는 승려들을 따라 군중들은 장터를 세 바퀴 정도 돌며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하였다. 반봉출·성도일·박권하·이상발·장만식·장인식 등 시위 군중은 헌병주재소를 포위하고 돌을 던져 주재소를 완전히 부수고 헌병군조 명화해차(名和海次)마저 짓밟아 버렸다. 이즈음 밀양 헌병분견소로부터 헌병이 증파되어 발포하자 오후 2시경 시위 군중들은 강제로 해산되었다.

표충사 승려들이 주도하고 농민들이 참가한 단장면 용회동 장터만세운동은 지역 운동으로는 대규모의 농민항쟁이었다. 시위 주도자들은 민족 대표의 최후의 신탁을 배반하지 말아야 한다.’는 격문을 배포하면서 헌병주재소를 완전히 파괴 하고 일본 헌병을 때려눕히는 등 농촌의 전형적인 폭력투쟁으로 발전한 모습을 보였다.

이날 만세운동으로 364명이 검거되고 71명이 검사국으로 송치되었는데 19191120일 부산 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열린 재판에서 반봉출 선생은 형 반봉갑과 함께 보안법 위반 및 소요죄로 태 90도를 받았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201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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