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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의 독립운동가

참고문헌: 최필숙(2017). 일제 강점기 미리벌의 분노와 희망. 밀양독립운동사연구소 

홍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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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독립기념관 댓글 0건 조회 365회 작성일 18-09-26 11:53

본문

홍 재 문(洪 在 文)

 

1897.3.20. ~ 1958.7.15.

내이동

3·1운동(군자금모집)

애국장(1990)

 

선생은 밀양면 내이동 출신으로 1913년 제3회 밀양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동네 친구인 권잠술·김소지·노재석 등이 1919년에 있었던 3·13밀양만세운동을 주도할 때, 홍재문 선생은 부산진 공립보통학교의 훈도(=교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191931110시경 영국인 선교사가 운영하는 일신여학교의 학생 주경애·김복선·송명진·김응수·김봉애 외 13명이 공모하여 구()한국기를 만들어 좌천동 거리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다 일경에 체포되어 구금되었다. 그들이 옥중에서 온갖 참형과 곤욕을 치루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울분을 삼키고 있던 선생은 자신이 근무하는 부산진 공립보통학교 4학년생인 배수원(裵守元) 등과 여러 차례 독립만세운동에 대한 회의를 하였다. 그 결과 43일을 기하여 기독교인들과 함께 만세운동을 결행하기로 하고, 민중의 독립정신을 함양하기 위해 조선독립신문을 발행하기로 하였다.

43일 오후 230분경 홍재문 선생은독 립만세라고 쓴 큰 깃발을 부산부 좌천정(佐川町) 거리에 세우고 수백 명 군중의 선두에 서서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며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시위 군중은 일제 경찰에 의해 강제 해산되고 홍재문 선생은 체포되었으나, 초범에 보통학교 훈도라는 이유로 훈계방면 되었다.

그 뒤 학교를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와 쉬고 있으면서도 독립의지를 불태워오던 선생은 같은 동네 친구인 권잠술과 의기투합하여 192010월부터 19215월 사이 밀양군 부북면 사포리 출신 부호 안홍원으로부터 상해 임시정부 군자금에 소요될 자금 5만원을 출연토록 강요했다가 3천원을 강취한 사건으로 인하여 1921630일 강도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 사건으로 선생은 강도 및 보안법 위반 혐의가 적용되었다. 일제는 보안법 위반법률에 의해 선생에게 1심에서 10년형을 언도하였다. 홍재문 선생은 72일 항소를 포기하고 징역 10년 형이 확정되어 부산교도소에서 복역하였다. 그러던 중 행형성적이 우수하여 1924년 칙령 제10호에 의거 징역 76월로 감형되었다가 1927227일에 다시 칙령 제12호에 의거 징역 6617일로 감형되었다. 1927623511개월 21일간의 복역을 마치고 가출옥하였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90년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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