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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의 독립운동가

참고문헌: 최필숙(2017). 일제 강점기 미리벌의 분노와 희망. 밀양독립운동사연구소 

백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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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독립기념관 댓글 0건 조회 505회 작성일 18-09-26 13:06

본문

 

백 운 하(白 雲 下)

 

? ~ 1908. 08. 21.

무안면

의병항쟁(을사, 정미의병)

애국장(2014)

 

19051117일 일제는 을사늑약을 강요하여 우리의 외교권을 강탈하였고, 이를 관장할 기구로 통감부를 설치하였다. 이등방문(이토 히로부미)이 초대 통감으로 부임하여 내정과 외부를 장악하고, 특히 대한제국의 외교문제를 마음대로 휘둘렀다.

우리는 외교권을 박탈한 을사늑약에 동의한 다섯 명의 대신을 을사 5적이라 한다. 박제순(외부대신), 이완용(학부대신), 이근택(군부대신), 이지용(내부대신), 권중헌(농상부대신) 등 을사오적은 조약 체결에 적극 찬성하였고, 참정대신이었던 한규설만이 이에 반대하다 끌려나오게 되었다. 을사늑약의 부당함이 알려지자 전국에서 이에 대한 저항운동이 일어났다. 먼저 조병세 등이 상소를 올렸고, 민영환은 자결로써 부당함을 호소하였다.

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났으며, 오적암살단이 조직되는 등 저항이 심해지는 가운데, 정부에서는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세계만방에 호소하기 위해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 이준, 이위종을 대표자로 파견하였으나 러시아와 일본의 방해로 회의장에 들어가지도 못했다. 그러나 일본은 이를 빌미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을 강요하여 차관정치를 통해 우리의 내정을 장악 하였다. 뿐만 아니라 조선 지배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될 것이라

고 생각하여 군대마저 해산시켰다. 이에 해산된 군인들이 크게 반발하였으며 유생과 농민들이 이에 동조하며 정미의병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기존의 의병과는 달리 군인들의 참여로 전투력이 향상되었을 뿐만 아니라 전국 곳곳에서 항쟁이 일어났다.

백운하 선생은 을사늑약 이후부터 의병을 일으켜 활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19088월에는 군자금을 모금하다(일본측 보고서에는 인민의 재물을 약탈한다고 기록) 붙잡히자 도주를 하려다 사살 당하였다. 문서에는 백운하 선생 외에 6명이 함께 사살당한 것으로 나타나 있지만, 다른 이는 누구인지 알 수 없어 더욱 안타깝다. 그 동안의 연구에 의하면 밀양 지역의 의병활동 상황을 알 수 없었으나, 백운하 선생이 의병활동으로 애국장에 추서되면서 그 사실의 일부가 알려지게 되었다. 백운하 선생은 경남 하동의 정상재 선생의 노력으로 2014년 애국장에 추서되었다 .

관련 문서를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경주수비구 사령관 이사와(井澤) 소위 보고(828일 경주로부터)

부산수비대장 小柳 대위(계급) 보고(822일 부산으로부터)

밀양수비대장 山本 소위(계급) 보고에 의하면 821일 밀양군 무안동(밀양 서남방 약 3) 부근에서 적도 약 7명이 인민의 재물을 강탈하였다고 하는 보고를 접하여 오전 8시에 검거를 위하여 하사 이하 5명을 파견하여 무안동에 이르니 토민(지역민)이 적 1명을 포박한 것을 데려와 심문한 결과 부근 각 지역에 잠복 중이라는 사실을 확보하여 여러 방법으로 3일간 노력하여 적괴 백운하 이하 6명을 체포하였으나, 세상을 시끄럽게 한 적들이 도중에 도주를 도모하는 등 저항하므로 이에 사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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