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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의 독립운동가

참고문헌: 최필숙(2017). 일제 강점기 미리벌의 분노와 희망. 밀양독립운동사연구소 

설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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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독립기념관 댓글 0건 조회 457회 작성일 18-09-26 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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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만 진(薛 萬 鎭)

 

1894.7.27. ~ 193311.26.

내일동 195

3·1운동(3·13밀양만세의거)

대통령표창(2008)

 

일명 설인길(薛仁吉)이라고도 불렸던 설만진 선생은 내일동 195번지에서 부친 설경직(薛敬直)의 장남으로 태어나 내일동에서 음식점을 경영했다. 고종의 인산에 참여하기 위해 상경하였다가 191931일 파고다공원 만세 현장에서 독립선언서를 획득하여 밀양으로 돌아온 윤세주와 윤치형이 동화학교 교장을 지낸 전홍표 선생을 찾아가 서울에서의 만세시위 상황을 알렸다. 그 후 을강 선생의 지도를 받아 동지들과 독립만세시위를 할 것을 결의하고 만세운동 준비를 시작할 때 설만진 선생도 가담하였다.

설만진 선생은 동지들과 함께 밀양면 사무소와 부북면 사무소의 등사판을 몰래 훔쳐내어 아북산으로 올라가 병풍을 둘러 불빛을 가리고 독립선언서를 밤새워가며 수천 매를 등사하여 숨겨두었다. 그리고 김시악(백민 황상규의 부인이복수(고인덕의 부인), 김영수(전 예총밀양지부장 안영의 조모) 등 대부분의 여성 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윤세주의 집에서 2~3일에 걸쳐 태극기를 수백 매 만들어 윤세주의 집과 밀양 장터 옆에서 쌀가게를 하는 김병환의 집에 숨겨두었다. 그리고 313(음력 212) 밀양 장날에 독립만세시위를 하기로 결정한 후 인근 부락에 사는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에게 비밀리에 연락하였다.

당일 설만진 선생을 비롯한 시위 주동자들이 각기 준비된 물품을 품속에 숨기고 밀양공립보통학교 앞 밀양 장터에 모인 천여 명의 군중 속으로 파고들었다. 오후 130분경 조선독립만세라고 크게 쓴 기를 군중 속에 펼쳐 세우고, 윤세주가 높은 곳에 올라서서 독립선언서를 큰 소리로 읽는 동안 선생을 비롯한 18명의 동지들과 여성 기독교인들을 비롯한 사람들은 독립선언서를 재빨리 군중 속에 골고루 뿌리고 태극기를 나누어 주었다.

윤세주가 독립선언서 낭독을 마치고 두 손에 태극기를 움켜잡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치자 중간 중간에 끼어 있던 주동자들과 수천의 군중들이 태극기를 휘날리며 조선독립만세를 함께 외치니 밀양공립보통학교 앞 장터는 삽시간에 만세 소리로 떠나갈 듯했다.

밀양에 주재하고 있던 10여 명의 헌병과 경찰병력이 총칼을 휘두르며 군중을 해산시키려 하였으나 해산시키지 못했다. 그러자 부산 일본헌병수비대 병력이 파견되어 가까스로 진압하였다. 군경의 무자비한 총칼 앞에 결국 시위대는 해산되고 만세시위 주모자들은 검거되었다.

1919414일 밀양지청에서 진행된 재판에서 설만진 선생은 보안법 위반의 죄목으로 징역 4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1919.8.14. 부산형무소) 후에도 항일투쟁의 의지를 굽히지 않고 독립운동의 방도를 모색하던 중, 192010월에는 이장수와 함께 의열단에 가입하였고, 밀양청년회 활동에도 활발히 참여하던 선생은 1922215일 서문안 예배당에서 결성된 영광운동단(단장 崔昇杰)에 정동찬(丁銅燦)과 함께 고문으로 추대되었고, 422일에는 밀양청년회에 체육위원으로 선임되기도 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200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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