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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의 독립운동가

참고문헌: 최필숙(2017). 일제 강점기 미리벌의 분노와 희망. 밀양독립운동사연구소 

손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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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독립기념관 댓글 0건 조회 485회 작성일 18-09-26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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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기 석(孫 其 錫)

 

189310.25. ~ 1925.5.23.

산내면 원서리

3·13운동(단장 용회동만세의거)

대통령표창(2011)

 

손기석 선생은 191944일 단장면 태룡리에 있던 용회동 장터만세운동에 참가한 사람이다. 일명 태룡장터만세운동이라 불리던 이 용회동장터만세운동3·1운동 당시 민족 대표였던 한용운의 간접적인 영향을 받고 추진되었다. 한용운은 경성불교 중앙학교 학생 오택언과 지용준을 통도사로 보내 시위운동을 주도하게 했다. 320, 통도사 승려 5명이 표충사를 방문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계획하면서 44일 단장면 태룡리 장터에서 장날 만세시위운동을 할 것을 결정하였는데, 이날은 사명당의 춘향일이라 사람들이 더 많이 모일 것이라 예상하였다.

승려들은 독립선언서를 등사하고 태극기를 만들어 시위 준비를 하면서 인근 사찰과 단장면·산내면·산외면 등에 시위운동 계획을 비밀리에 알렸다. 이장옥은 법무계 서기 김종석에게 선서라는 제목의 취지문을 수백 장 등사하게 했다.

손기석 선생은 원서리 사람이므로 44일 용회장에 원서리 주민들이 많이 모이도록 독려하라는 부탁을 받고 주민들에게 이런 사실을 통보하였다. 장날이 되자 이장옥·이찰수·오학성·손영식·김성흡·구연운·오응석 등 시위 주도 승려들은 민간복으로 변장하고 각기 준비물을 감추어 장꾼 속에 숨어 장터로 들어왔다. 미리 연락해 두었던 학생 50여 명은 독립선언서와 태극기 등을 배포하였다. 정오쯤 5천여 명의 남녀노소가 장터에 모여들자 1230분 표충사 승려들이 죽간 끝에 조선독립만세라고 크게 쓴 기를 매달아 시장 중앙에 높이 세웠다. 나팔 소리를 신호로 구연운이 높이서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일본의 침략 행위를 규탄하였다. 이어 독립만세를 외치자 수천 군중이 독립만세를 외쳤다.

장터를 돌던 손기석·성도일·박권하·이상발·장만식·장인식 등 시위 군중은 헌병주재소를 포위하고 돌을 던져 주재소를 완전히 부수고 헌병군조 명화해차(名和海次)마저 짓밟아 버렸다.

밀양 헌병분견소로부터 헌병과 경찰서 순사가 긴급 출동하여 발포를 해 오후 2시경 시위 군중들은 강제로 해산되었다 .

표충사 승려들이 주도하고 농민들이 참가한 단장면 태룡리 용회동장터만세운동은 지역운동으로는 대규모의 농민항쟁이었다. 시위 주도자들은 민족 대표의 최후의 신탁을 배반하지말아야 한다.’는 격문을 배포하고 헌병주재소 파괴, 일본 헌병을 때려눕히는 등 농촌의 전형적인 폭력투쟁으로 발전한 모습을 보였다.

이날 만세운동으로 364명이 검거되고 71명이 검사국으로 송치되었는데 19191120일 부산 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열린 재판에서 손기석 선생은 보안법 위반 및 소요죄로 태 90도를 받았다.

손기석 선생은 계속 일본경찰에게 예비검속을 당했으며, 1925522일 부산 검사국 밀양 분국의 호출로 밀양경찰서 유치장에 구금된 다음날 사망하였다. 일본 경찰은 그가 폐병으로 사망하였다며 24일 시신을 인계하였으나 가족들은 폐병을 앓은 사실이 없었다고 증언하므로 유치장에서 가혹한 구타로 억울하게 절명한 것으로 판단된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2011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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