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어닫기
경남 밀양시 밀양대공원로 100 jsseul@korea.kr 055 . 359 . 6060

밀양의 독립운동가

참고문헌: 최필숙(2017). 일제 강점기 미리벌의 분노와 희망. 밀양독립운동사연구소 

손봉현

페이지 정보

작성자 독립기념관 댓글 0건 조회 582회 작성일 18-09-26 12:58

본문

손 봉 현(孫 鳳 鉉)

 

1894.311. ~ 1969.7.10.

상동면 가곡리 220

만주방면(신민부 군자금모집)

애족장(2010)

손봉현 선생은 1894311일 밀양군 상동면 가곡리 220번지에서 아버지 손진옥(孫振玉)과 어머니 황유인(黃柳仁)의 슬하에서 2남으로 태어났다. 이명은 말봉(末鳳), 아호는 승휘(昇徽)였다.

7세 때 서당에 들어가 동몽선습, 소학, 대학을 비롯하여 사서와 삼경을 배웠고, 15세 때부터는 산외면 남기리 장승 마을에 있던 한의원의 보조원으로 들어가 한약재를 다루는 법과 침, 뜸을 익혀 평생의 직업으로 삼고자 하였다.

18세 때인 19115월에는 밀양군 단장면 사연리 316번지에 거주하던 김태진의 장녀 태동(台童)과 혼인한 후에 스스로 한약방을 열어 가솔들의 생계를 유지해 가장의 역할에 충실하였다.

그러나 밀양에서 일어난 19193·13만세의거와 315일 밀양유림들의 만세시위 그리고 42일에 일어난 밀양소년단 만세운동 및 44일 대대적으로 벌어진 용회동 장터의 만세

운동 등등 일제에 항거하는 주민들의 울분을 목격하기도 하고, 본인도 만세 현장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는 마음도 생기게 되었다. 특히 태룡리 용회동장터만세운동에 참여한 후 중국으로 떠났다가 1923년부터 고향을 오가며 뭔지는 모르겠지만 특별 임무라는 것을 수행해 오던 동서 손호와 지인인 김홍규, 이병묵 등이 북간도 무송지역에서 대종교 포교와 교육사업을 통해서 줄기차게 독립운동을 전개해 오고 있던 밀양군 부북면 출신 선배인 단애 윤세복 선생의 활약상을 이야기해줄 때에는 본인도 참여하고 싶은 큰 충동을 느꼈다.

이들로부터 같이 참여하지 않겠느냐는 권유를 받고는 곧바로 한약방 일을 접고, 19253월에 북만주에 있는 영안 지역으로 건너가 윤세복이 이끄는 대종교에 입교하였다. 그리고 대종교 교인들이 중심이 된 대한독립군단, 대한독립군정사를 주축으로 북만주 지역의 독립운동 단체들이 조직한 신민부의 일원으로 가입하여 활동하게 되었다.

19274, 일찍이 일본군과 맞붙어 청산리대첩을 이끌었던 신민부 중앙집행위원장 백야 김좌진 장군으로부터 일제 고관과 친일 분자의 주살, 주요 시설의 폭파, 군자금 모집 등의 밀명을 받고, 밀양 출신으로 같은 신민부부원이면서 단애 윤세복의 조카 사위(형 윤세용의 사위)인 이병묵과 자신의 동서인 단장면 출신 손호, 지인 김홍규·손량윤·윤창선·신현규

등과 함께 국내에 들어와 경북 지역을 중심으로 신민부에서소요될 군자금을 모으는 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해 나갔다.

192711월 초순 밀양군 단장면 사연리에 살던 부자이며, 선생의 장인인 김태진을 동지들과 함께 미혹하게 하여 군자금 3,000원을 받아냈다. 이 과정에서 처남인 김용출을 포섭하여 북간도로 데려가 대종교인으로 만드는 등의 임무를 수행 중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1928731대정 8년 제령 제7호 위반등의 혐의로 체포되었다. 3년의 실형을 언도받고 상고를 포기한 채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193183년의 형기를 마치고 출감하였으나 옥중에서 받은 온갖 악형과 고문의 후유증으로 몸을 추스를 수 없을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었다. 비록 뜻은 나라를 위한 일이었으나 고향에 있는 장인에 대해서는 인간적으로 죄송한 마음도 많았고 몸까지 온전치 못한 상태로서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고 판단하여 다시 동지들의 도움을 얻어 단애 선생이 머물고 있던 밀산 당벽진 지역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선생이 만주로 건너갈 즈음인 1931918일에 만주사변이 발생하여 일제가 만주 전역을 침략하고 만주국을 세우는 등 혼란이 도래하자 단애 선생이 발해의 수도였던 동경성 지역으로 대종교 총본사를 옮겨가게 될 때 이 무리에 동참하였다. 동경성이 위치한 경박호 부근에는 이주 한인촌이 많았기 때문에 대종교의 포교에 발맞추어 선생이 할 수 있는 침, 뜸과 한의술을 동포들에게 제공하면서 1940년경까지 영안, 목단강과 연결되는 동경성 지역에서 생활하다가, 선생은 1941년 봄에 밀양으로 돌아왔다.

독립운동을 위해 고향을 떠난 지 15여 년만에 귀향하였으나 선생이 없는 동안 안타깝게도 아내(金台童)가 타계하고 없어 슬픈 마음을 표현할 길이 없었다. 선생은 집안 어른들의 권유로 다시 새장가를 들어 마음의 안정을 찾기 시작했고, 6·25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먼 친척지간으로 밀양의 만석꾼이라고 일컫던 오산 참봉 손영돈의 집에서 집사 일을 맡아 소임을 다했다.

노년에는 젊어서부터 직업으로 삼고자 익혔던 침, 뜸 등 한의술을 영리 목적이 아닌,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서만 봉사하였고, 슬하의 51녀 중 장남이 일찍 타계한 관계로 둘째 아들 호달(浩達)의 극진한 봉양을 받다가 1969710일 운명하니 향년 76세였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2010년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