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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의 독립운동가

참고문헌: 최필숙(2017). 일제 강점기 미리벌의 분노와 희망. 밀양독립운동사연구소 

손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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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독립기념관 댓글 0건 조회 499회 작성일 18-09-26 12:57

본문

손 일 민(孫 逸 民)

 

1884.8.15. ~ 1940.9.9.

산외면 다죽리 249

임시정부

애국장(1990)

 

회당(晦堂) 손일민 선생은 밀양군 산외면 다원리(다죽리) 249번지 출신으로, 이명으로 일민(一民), 기정(基鼎) 또는 기정(基禎) 이라 쓰기도 했다. 일제에 의해 국권이 침탈되자 선생은 조국독립의 의지를 품고 1912년 단애 윤세복이 머물고 있던 서간도 환인현으로 망명하였다. 단애 선생과 함께 환인현 서문안 도심의 정양가도(지금의 백화점 자리)에 동창학교를 설립하여 민족정신을 고취하는 교육사업을 펼쳤다.

선생은 1915년 음력 12월에 만주 길림에서 우이견·주진수 등과 협의하여 국권 회복과 조선 독립을 목적으로 한 광복회를 조직하였다. 국내에서도 독립단 형성을 목적으로 군자금 모집을 계획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1917년 음력 8월 서울 인사동 출신 어재하와 경북 풍기의 채기중 집에서 광복단 이름으로 포고문을 작성하여 경북과 충남의 자산가들에게 우편으로 발송하는 등 군자금 모집 활동을 벌였다. 10월 이후 만주(길림, 봉천 등)에서 국권회복운동에 투신한 지사들과 새로운 비밀결사 지하단체 조직을 모색하면서 밀양 출신인 김대지와 그 외 이종암·구영필 등과 접촉하였다.

19192, 길림에서 이승만·안창호·이시영·김좌진·박은식을 비롯해서 밀양 출신인 윤세복·황상규 등 39인이 서명한 대한독립선언서에 대종교에 몸담았던 선생도 민족 대표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였다. 이 선언은 19192월 길림에서 조직된 대한독립의군부가 주체가 되어 발표한 것이며 무장투쟁에 의한 절대독립을 주장하고 있다 .

1919년 선생은 대한독립단 단장 조맹선과 협조하여 독립운동을 하였다. 19201월 길림의 대한군정사에서 여준, 박찬익 등과 함께 무기 운반에 관한 비밀회의를 열어 무장 독립투쟁도 적극 지원하였다. 의열단의 창단에도 깊이 참여하여 의열단장 김원봉의 자문에도 응하였고, 길림의 북로군정서에서 재정을 담당하고 있던 황상규와 상해 임시정부에서 활약하고 있던 김대지를 만나 독립운동을 위한 투사 육성과 독립운동 자금조달책을 협의하였다. 이들 세 사람은 독립운동의 동지이자 동향의 친구와 선후배 사이라 각별히 친하게 지내는 사이였다. 특히 선생은 김대지와 황상규의 선배로서 그 역할을 다하고 있었다 .

1922317일 매일신보에 따르면 주진수·양재훈·손일민·이홍주 등이 광복회를 조직하고 국권회복을 위한 포고문을 작성하여 각도의 부호들에게 보냈다. 십만 원, 이십만 원의군자금을 모집하였고, 상해가정부 특파원 명의로 군자금을 요구하였고 이에 응하지 않을 경우 폭탄대를 파견하여 사형에 처하겠다는 요구장을 발송하였다. 이들에 대한 공판은 공갈, 취재강도미수, 살인강도 교사 혐의로 경성 지방법원 7호 법정에서 열렸다.

19253월에는 북간도 영안현에서 결성된 신민부 검사원 위원으로 추천, 독립운동의 조직화와 체계화에 전력하였다. 왜냐하면 선생은 독립운동이 크게 성과를 거두지 못하는 것은 개별항쟁의 조직화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판단하였다. 1927년에는 일제의 추격을 피해서 하얼빈과 북경으로 옮겨가며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1934년 한국독립당 북경지부에서 조성환과 연계하여 활동하였고, 1935년 여름에 남경으로 옮겨가 약산 김원봉과 함께 조선민족혁명당 결성에 참여하였다.

선생은 1937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상임위원으로 선출되어 중국 정부와의 유기적인 연락을 맺으면서 조국독립에 기여하였다. 1940년에는 한국국민당 이사로 추대되었으며, 동년 8월 의정원 의원으로 재직하다가 기강에서 병사하였다.

백범은 백범일지에서 손일민 선생의 최후를 이렇게 기록하였다.

그 다음으로는 손일민 동지의 사망이다. 나이 60세에 항상 병을 안고 지내다 끝내 기강에서 한 줌의 흙이 되었다. 그는 청년시절부터 나라를 되찾겠다는 큰 뜻을 품고 만주 방면에서 다년간 활동하였고, 북경, 남경, 장사, 광주, 유주로 다니다가 결국 기강까지 와서 대가족에 편입되었다. 그는 자녀가 없고, 60세 된 미망인이 있을 뿐이었다. ”

1990년 애국장을 추서 받았으나 광복 후에도 선생의 묘소를 찾지 못하였다. 2004년 정부의 해외 독립운동가 유해발굴사업으로 기강에서 유해를 발굴하여 20041228일 국립묘지에 안장하였다.

아들(양자) 손태호는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 평생을 애썼으나 갑자기 사망하여 손자, 손녀들이 할아버지에 대해 제대로 알 수 없었다고 한다.

최근 손자, 손녀들의 노력으로 회당 선생의 기적비가 산외면사무소 앞에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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