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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의 독립운동가

참고문헌: 최필숙(2017). 일제 강점기 미리벌의 분노와 희망. 밀양독립운동사연구소 

신기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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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독립기념관 댓글 0건 조회 424회 작성일 18-09-26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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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기 균(申 機 均)

 

1860.7.12.~ 1941.9.12.

상남면 예림리 1072

국내항일(임정군자금)

대통령표창(2008)

 

신기균 선생은 1860년 밀양군 상남면 예림리 1072번지에서 신영권의 4남으로 태어나 일찍이 동네 서당에서 한문을 익혀 유가의 법도에 따른 몸과 마음 가짐을 견지하였다.

선생은 예림재를 통해 유림활동을 하던 중 면우 곽종석이 주동하고, 밀양인 노상직을 비롯해서 허평(단장면박상윤(부북면이학규(삼랑진안종달(산외면손상현(산외면강신혁(부북면김태린(청도면) 등 총 137명이 서명하여 작성된 독립청원서(일명, 파리장서)를 파리평화회의에 보내 한일병탄의 부당성을 세계 만방에 알리려 했던 유림단 파리장서 서명에 연루되어 대구경찰부에 체포되어 고초를 당하였다.

1920년대 초에 민족주의 운동가들이 전국적 차원에서 민립대학 설립운동과 물산장려운동을 전개하자 밀양 지역에도 이러한 운동이 파급되었다. 1923226일 오전 11시 박상일 외 50명의 유지들이 모여 밀양물산장려회 발기 총회를 개최하였다.

임시 석장(席長) 박해철의 사회로 제반 사항을 논의하면서 금주·단연 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311일 육영재에서 창립 총회를 개최한 결과 출석 인원 6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선생이 총재로 당선되었다. 물산장려회의 주요 사업은 토산품장려와 단주·단연이었는데, 밀양면·삼랑진면·산내면·부북면 등에서의 활동이 활발하였다.

밀양 지역의 교육진흥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1923311일 육영재에서 밀양교육회가 창립될 때 선생은 밀양 지역 원로인 박상일·노상직·이병희 등과 함께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1924년 음력 7월 하순경 같은 밀양교육회 고문이자 동지인 김찬규로부터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한 임시정부 군무총장 노백린 명의의 군정서 총국장에 임명한다는 취지의 사령서를 받게 되자 군정서 국내 운동원이 되었으며, 30원의 군자금을 제공하였다.

19261월경 밀양에서 신석원·송채원과 함께 경북 경찰부 고등계 형사에게 체포되었고, 323일 대구 지방법원에서 무죄 선고를 받고 석방되었으나 이후 19309월경 권총을 반입 하다 다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200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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