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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의 독립운동가

참고문헌: 최필숙(2017). 일제 강점기 미리벌의 분노와 희망. 밀양독립운동사연구소 

안종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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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독립기념관 댓글 0건 조회 450회 작성일 18-09-26 12:52

본문

안 종 달(安 鍾 達)

 

1878.11. 12. ~ 1929. 3. 2.

산외면 금곡리 339

31운동(파리장서)

건국포장(2018)

 

 

1878년 아버지 안연원(安演遠)과 어머니 노상이(盧相而)2남으로 태어난 안종달(安鍾達: 1878. 11. 12 ~ 1929. 3. 2) 선생은 자는 학초(學初)이며, 구한말 홍문관시강(왕과 동궁의 교육담당)을 지내다가 간도로 망명후 항일운동을 계속한 대눌 노상익(盧相翼)선생과 단장면 노곡리의 자암서당을 근거지로 항일정신으로 선비의 지조를 밝히신 소눌 노상직(盧相稷)선생의 생질로 당시 영남일대에서 노곡선생(蘆谷先生)으로 알려진 한학자였다. 선생은 장서사건 당시 자암서당의 연장자로서 동학, 사제들과 함께 일제의 국권침탈에 항거하다가 소눌과 함께 옥사를 겪은 후 병사하였다.

파리장서사건은 19191차 세계대전 이후 파리에서 개최된 만국평화회의에서 조선 유림대표 137인이 연명으로 일제의 국권침탈을 국제사회에 고발하고 독립국가 조선의 위상을 밝힌 구한말 선비중심의 독립운동으로 이 사건 이후 일제는 서명자를 일제 투옥하고 관련자를 일본 고등경찰요사에 등록하여 그 가족들까지 경찰의 요시찰 인물로 감시하게 하였다.

1919년 삼일운동 직후 학초선생의 나이 42세에, 경북 성주에서 심산 김창숙이 밀양으로 당대 유림의 거목이었던 소눌을 찾아 밀양으로 왔을 때 소눌의 제자 13인을 규합하여 단장면 풍뢰정에서 파리장서 서명에 앞장섰다. 선생은 이 일로 밀양헌병대에 이첩되어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도 망국의 선비지만 나라를 생각하는 도리를 잊지 말자고 사제들을 지도하는 등 의연함을 보였다고 소눌문집(1934)에 기록되어 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2018815일 건국공로훈장(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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