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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의 독립운동가

참고문헌: 최필숙(2017). 일제 강점기 미리벌의 분노와 희망. 밀양독립운동사연구소 

오학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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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독립기념관 댓글 0건 조회 502회 작성일 18-09-26 12:45

본문

 

오 학 성(吳 學 成)

 

1880.10.1. ~ 1925.6.9.

단장면 구천리 411

31운동(단장 용회동만세의거)

애족장(1995)

 

오학성 선생은 단장면 구천리 소재 표충사의 승려로 191944일 단장면 태룡장터만세운동을 주도한 최연장자(당시 37)이다. 일명 태룡장터만세운동이라 불리던 이 용회동 장터만세운동은 민족 대표의 간접적인 영향을 받고 추진되었다. 민족 대표인 한용운은 경성불교 중앙학교 학생 오택언과 지용준을 통도사로 보내 시위운동을 주도하게 했다.

통도사 승려 5명은 320일 표충사를 방문하여 조선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고 44일 단장면 태룡리 장날 만세시위운동을 할 것을 결정하였다.

표충사 승려들이 독립선언서를 등사하고 태극기를 만들어 시위 준비를 하면서 인근 사찰과 단장면, 산내면, 산외면 등에 시위운동 계획을 연락하였다. 표충사 강사 및 법무계 책임을 맡은 이장옥은 법무계 서기 김종석에게 선서라는 제목의 취지문을 수백 장 등사하게 했다.

표충사 승려들은 각 마을을 나누어 집집마다 비밀리에 다니면서 44일 태룡장에 나와서 만세를 부를 것을 연락하였는데, 오학성 선생은 고례리 주민들에게 44일 태룡장에 모이도록 독려하는 책임을 맡았다. 장날이 되자 용회동에 있는 장터에는 아침 일찍부터 장꾼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선생을 비롯한 이장옥·이찰수·오학성·손영식·김성흡·구연운·오응석 등 시위 주도 승려들은 민간복으로 변장을 하고 각기 준비물을 감추고 장꾼 속에 숨어 장터로 들어왔다. 그리고 미리 연락해 두었던 학생 50여 명에게 독립선언서와 태극기 등을 배포하도록 하였다. 정오쯤에는 5천여 명의 남녀노소가 장터에 모여들었다. 1230분 표충사 승려들이 죽간 끝에 조선독립만세라고 크게 쓴 기를 매달아 시장 중앙에 높이 세웠다. 나팔 소리를 신호로 구연운이 깃대 앞에 높이서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일본의 침략 행위를 규탄하였다. 이어 독립만세를 외치자 수천 군중이 호응하여 독립만세를 외쳤다.

큰 기를 펼쳐들고 앞에서 행진하는 승려들을 따라 군중들은 장터를 세 바퀴 정도 돌며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하였다. 이강조·성도일·박권하·이상발·장만식·장인식을 비롯한 시위 군중 대열은 헌병주재소를 포위하고 돌을 던져 주재소를 완전히 부수고 헌병군조 명화해차(名和海次)마저 짓밟아 버렸다. 이즈음 밀양 헌병분견소로부터 헌병이 증파되고 경찰서 순사가 긴급 출동하여 발포하여 오후 2시경 시위 군중들은 강제로 해산되었다.

표충사 승려들이 주도하고 농민들이 참가한 단장면 태룡리 용회동 장터만세운동은 지역운동으로는 대규모의 농민항쟁이었다. 시위 주도자들은 민족 대표의 최후의 신탁을 배반하지 말아야 한다는 격문을 배포하면서도 헌병주재소를 완전히 파괴하고 일본 헌병을 때려눕히는 등 전형적인 폭력투쟁으로 발전하였다.

이날 만세운동으로 364명이 검거되고 71명이 검사국으로 송치되었는데 19191120일 부산 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열린 재판에서 오학성 선생은 보안법 위반 및 소요죄로 징역 3년형을 언도 받고 항소하였으나, 1210일 대구 복심법원에서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95년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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