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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의 독립운동가

참고문헌: 최필숙(2017). 일제 강점기 미리벌의 분노와 희망. 밀양독립운동사연구소 

윤방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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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독립기념관 댓글 0건 조회 498회 작성일 18-09-26 12:42

본문

 

윤 방 우(尹 芳 友)

 

1896.3.2. ~ 1927.2.13.

내이동 991

31운동(3·13밀양만세의거)

대통령표창(2002)

 

윤방우 선생은 밀양시 내이동 991번지에서 부친 윤치완(尹致完)의 장남으로 출생하여 1914년 김양이(金襄伊)와 결혼하였고, 윤영수(尹永守 1915년 생), 윤영순(尹永淳 1918년 생) 등 두 아들을 두고 농업에 종사하였다. 191931일 파고다공원 만세현장에서 독립선언서를 획득하여 밀양으로 돌아온 후배 윤세주와 친구인 윤치형이 동화학교 교장을 지낸 전홍표 선생을 찾아가 서울에서의 만세시위 상황을 전하고 선생님의 지도를 받아 또래의 동지들과 여성 기독교인을 규합하여 밀양에서

도 독립만세시위를 할 것을 의논하고 만세운동 준비를 시작하게 되었을 때 윤방우 선생도 처음부터 참여하게 되었다.

밀양면 사무소와 부북면 사무소의 등사판을 밤에 몰래 훔쳐내어 아북산으로 올라가 병풍을 둘러 불빛을 가리고 독립선언서를 밤새워가며 수천 매를 등사하였다. 그리고 김시악(백민 황상규의 부인이복수(고인덕의 부인), 김영수(전 예총밀양지부장 안영의 조모) 등 대부분의 여성 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윤세주의 집에서 2~3일에 걸쳐 태극기를 수백 매 만들어 윤세주의 집과 밀양 장터 옆에서 쌀가게를 하는 김병환의 집에 숨겨두었다. 313(음력 212) 밀양 장날에 독립만세 시위를 하기로 결정한 후 인근 부락에 사는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에게 비밀리에 연락하였다.

당일 윤방우 선생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각기 준비된 물품을 품속에 숨기고 밀양공립보통학교 앞 밀양 장터에 모인 천여 명의 군중 속으로 파고들었다. 오후 130분 경 조선독립만세라고 크게 쓴 기를 군중 속에 펼쳐 세우고, 윤세주는 높은 곳에 올라서서 독립선언서를 크게 읽어 나갔다. 선생은 동지들과 여성 기독교인들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재빨리 군중 속에 골고루 뿌리고 손에손에 태극기를 나누어 주었다.

윤세주가 독립선언서 낭독을 마치고 두 손에 태극기를 움켜쥐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치자 중간 중간에 끼어 있던 동지들을 위시하여 수천의 군중들이 태극기를 휘날리며 조선독립만세를 함께 외치니 밀양공립보통학교 앞 장터는 만세 소리로 떠나갈 것만 같았다.

만세를 부르는 군중들은 열광하여 앞장선 큰 깃발을 따라 거리를 누비며 시위행진을 시작하였는데 밀양 거리는 온통 만세군중의 시위로 아수라장이 되어버렸고, 시위대 중 일부는 밀양공립보통학교로 들어가 운동장을 내달으며 뜨거운 만세 함성을 지르기도 했다.

밀양에 주재하고 있던 10여 명의 헌병과 경찰 병력 이 총칼을 휘둘러도 군중을 해산시키지 못하여 부산 일본헌병수비대 병력이 급파되어 가까스로 진압하기에 이르렀다. 군경의 무자비한 총칼 앞에 결국 시위대는 해산되고 만세시위 주모자들은 검거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연행되어 고문을 당하고 재판에 회부되었는데 1919414일 부산 지방법원 밀양지청에서 진행된 재판에서 윤방우 선생은 보안법 위반의 죄목으로 태 90도를 받았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200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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