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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의 독립운동가

참고문헌: 최필숙(2017). 일제 강점기 미리벌의 분노와 희망. 밀양독립운동사연구소 

윤세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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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독립기념관 댓글 0건 조회 585회 작성일 18-09-26 12:36

본문

윤 세 복(尹 世 復)

 

1881.3.29.~1960.2.13.

부북면 무연리 318

만주방면(대종교)

독립장(1962)

 

단애 윤세복 선생은 1881329일 밀양시 부북면 무연리 318번지에서 윤희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무송(茂松), 본명은 세린(世麟), 도호는 단애(檀崖), 자는 상원(庠元), 당호는 허당(虛堂)이다. 선생이 태어나던 시기는 개항 이후 밀려오는 외세의 거센 물결에 대항하며 근대화를 모색해가던 시기였다. 따라서 선생은 근대화라는 사회적 과제와 자주화라는 민족적 과제를 한 몸에 안고 태어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왜냐면 선생의 생애를 보면 이 같은 민족적사회적 과제를 방기하지 않고 온 몸으로 안고 살아간 인생이기 때문이다 .

선생은 토착 농민 집안이지만 경제적으로 청도창녕언양군 등지에 많은 농토를 가진 만석꾼으로 알려진 부호였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경제적 어려움 없이 형인 세용과 함께 마을의 응천재라는 학당에서 한학을 수학하였다. 그런데 청일전쟁 이후의 세상 변화를 보며 민중층의 욕구를 충족시키고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는 신학문을 수용하여 조국을 근대화하는 길이 최선이라고 여겼다. 선생의 이러한 생각에 영향을 끼친 것은 13살 위의 형이었다. 형인 백암 윤세용 선생은 이미 신학문을 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대구에서 설립된 측량강습소에서 3년간 측량 기술을 습득하고 1903년부터 6년간 고향의 소학교와 대구 협성중학교에서 학생들을 교육하였다. 1909년부터 대구부 토지조사국 측량 기사로 봉직하기도 하였다.

선생이 대구에 있는 측량학교에 입학하여 교육을 받고, 영남 지방을 순회하다 마침 학교 설립을 추진하고 있던 백산 안희제를 만났다. 이에 김동삼서상일남형우 등과 연결되어 1909년에는 비밀결사체인 대동청년단에 신채호신팔균이극로 등과 함께 단원으로 참가했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한일병탄이 되자 선생은 충격을 받았다.

한일병탄 이후 홍암 나철이 대종교를 만들어 독립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19101225일 홍암 선생을 방문한 윤세복 선생은 대종교의 취지와 목적역사종교시국에 관한 교훈을 감명 깊게 듣고는 본명인 세린(世麟)을 국권회복의 의지를 담은 세복(世復)으로 고치고, 단애라는 도호를 받으면서 19101229일 대종교에 입교하였다.

1911129일에 참교 및 시교사로 임명되었으며 교주 나철로부터 만주에서의 포교 의뢰를 받고서 음력 2월에 서간도로 나아가 환인에 정착하게 되었다. 입교한 지 불과 1-2개월 만에 전격적으로 망명이 이루어지고 중요한 임무가 주어진 것

을 보면 교단 내의 문제나 윤세복 한 개인의 종교적 결단이라기보다는 대동청년단 일부가 독립운동기지를 개척하려고 동반 망명 계획을 실천한 것이 아닌가 한다.

13년 연상인 친형 윤세용 선생도 밀양 부북에 소유하고 있던 많은 전답을 전부 처분하여 윤세복 선생과 함께 환인으로 건너가 환인현 서문안 도심의 정양가도에 동창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사업을 펼치고, 대종교 환인시교당도 문을 열어 간도로 이주해온 한인 동포들의 자제 교육과 포교 활동에 매진하게 되었다. 동창학교는 대종교를 모태로 한 민족학교로서 선생은 한민족의 조상은 백두산 기슭에서 나왔다. 중국 민족이나 일본 민족은 그 지류에 불과할 뿐이다. 따라서 우리 모두 국권회복에 노력하여 부여국과 부여 민족의 독립발전을 도모하지 않으면 안 된다.”며 학생들을 교육하였다. 이 학교에는 이원식이 교장으로 있었으며, 김규찬김동석김진 등이 교사로 있었고, 신채호박은식이극로 등도 교사로 일하였다.

또한 1914년 연해주(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물고 있던 단재 신채호를 초청하여 동창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면서 백두산을 답사하게 하고, 광개토대왕비도 찾고 <조선사>도 저술하게 하였다. 이 때 대종교의 영향으로 민족의 역사 신앙을 정립하게 된 단재는 대종교의 <단기고사>를 중시하였고 고대사 연구에도 집중하였다. 그러나 일본 영사관의 압력으로 동창학교는 폐교되고 선생은 1914년 무송현으로 옮겨갔다. 무송현에는 이미 백산학교가 설립되어 민족교육을 실시하고 있었는데, 선생은 백산학교의 전성규와 힘을 합해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그러나 이곳에서 일제의 사주를 받은 중국 관헌에게 체포되어 18개월의 옥고를 치른 후 출옥하였다.

191921일 대종교 교주 김교헌을 비롯해서 만주노령을 중심으로 당시 해외에 나가 있던 정치 지도자 39명이 우리나라의 독립을 선언한 글 즉,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하자 밀양인 황상규, 손일민 등과 같이 민족 대표로 서명하였다.

191931일 국내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무송현에서도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만세운동을 보면서 새로운 독립운동 방안을 모색하게 되었다.

19197월 무송현에서 조직된 흥업단은 평화적인 방법으로는 절대 일제로부터 독립할 수 없다고 생각한 단애 선생의 인식을 구체적으로 실현한 독립군 단체였다. 흥업단은 재만 동포들의 경제력을 향상시키고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산업 진흥에 노력하는 한편,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고자 조직한 것이다. 단장은 김호, 부단장은 김혁, 선생은 총무로 사무를 총괄하였다. 191912월 서일을 총재로, 김좌진을 사령관으로 하여 결성된 북간도 제일의 독립군 조직인 북로군정서와도 유기적인 관계를 맺었는데, 두 단체 모두 대종교 교도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대종교 종사로 있던 1920년 청산리전투에서 일본군들이 입은 피해에 대한 응징으로 백두산 지역에 살고 있던 우리 동포들을 잔인하게 학살한 일이 벌어졌는데 이를 간도참변’, 혹은 경신참변이라 한다. 이 때 한 사람의 동포라도 더 살리기 위해서 단애는 최대한의 노력을 하였다. 또한 북로군정서를 세운 백포 서일이 밀산 당벽진에서 1921년 토비의 습격을 받고 자결을 하자, 그를 대신해서 반석, 화전, 길림, 안도 등지에 대종교의 교당을 세우는 등 전체 이주 한인의 40%를 대종교인으로 인도하기도 하였다. 선생이 7천여 명의 대종교도를 이끈 공훈이 인정되어 192265일에 대종교 전리로 임명되었다 .

서일의 순교 이후 일본의 탄압으로 만여 만의 교도가 일본군에게 학살당한 것을 비통해 하던 무원종사 김교헌도 마침내 19231118일 단애 윤세복을 도사교로 지명하고는 자결하였다. 사실 김교헌을 만난 적은 있어도 대화를 나누어본 적이 없었으나 유명을 받은 선생은 영안현 남관으로 가 1924122일 제3대 교주, 즉 도사교에 취임하였다. 이후 교단을 쇄신하면서 독립운동에 헌신하던 선생에게 시련이 닥쳐왔다. 봉천성 경무처장 우진과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삼시궁송(三矢宮松) 사이에 19256월 맺은 삼시협약(미쓰야협정)의 부대 조항으로 인하여 대종교는 일대 위기를 맞게 되었다. 그 부대 조항은 대종교 주요 간부인 서일이 대한독립군의 수령으로서 그 교도들을 이끌고 일본에 항전하였으니, 대종교는 곧 반동군단의 모체로서 종교를 가장한 항일 단체이니 중국에서 영토 책임상 이를 해산시켜야 한다.”는 것으로 이 내용에 의해 192612월 길림성 성장이 대종교에 대해 포교 금지령을 내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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