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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의 독립운동가

참고문헌: 최필숙(2017). 일제 강점기 미리벌의 분노와 희망. 밀양독립운동사연구소 

윤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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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독립기념관 댓글 0건 조회 545회 작성일 18-09-26 12:35

본문

윤 세 용(尹 世 茸)

 

1868.12.12. ~ 1940.2.12.

부북면 무연리 318

만주방면(참의부 참의장)

독립장(1962)

 

윤세용(본명 윤세두) 선생은 밀양시 부북면 무연리 318번지에 서 18681212일 가선대부 부호군을 지낸 아버지 윤희진(尹熺震)과 어머니 밀성 박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래 동생은 대종교 3대 도교사였던 단애 윤세복이다. 선생의 자()는 상문(庠文), 호는 순가(舜可)였는데, 독립운동 중에 사용했던 호는 백암(白菴)이며 이름도 윤세용(尹世茸)과 윤세용(尹世鎔) 또는 윤성좌(尹聖佐)라 불리웠다.

선생은 일찍이 고향에서 한학을 익혔다. 그러나 기울어진 국권을 되찾으려면 후세대에게 독립사상을 심어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동생인 윤세복과 더불어 신창학교와 협성학교를 세워 교육에 진력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폭정이 날로 심해지자 선생은 비교적 부농이었던 가산을 모두 정리하여 동생 윤세복, 경북 예안 출신 이원식 등과 함께 1911년 말 요령성 환인현으로 망명하였다.

선생은 동생 윤세복의 친구 백농 이원식(일명 李東厦) 등과 함께 환인현 서문안 도심에 자리 잡고 있는 정양가도(지금의 백화점 자리)에 동창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사업을 펼쳤고, 동생 윤세복은 대종교 환인시교당의 문을 열어 간도로 이주해온 한인 동포들의 자제 교육과 포교활동에 매진하였다.

교장은 이원식이었고, 윤세용·이원식·이극로·김규환·김형(일명 金永肅) 등이 교육을 담당하였으며, 때로는 신채호, 박은식 등 저명한 독립운동가들이 이곳에 머물면서 청년들은 물론 그곳에 거주하는 동포들에게 학문을 교육하고 독립사상을 고취시켰다.

동창학교는 입학금이나 월사금을 받지 않고 누구든지 배울 뜻이 있으면 책과 학용품 일체를 제공하였으며, 기숙사가 있어서 침식도 모두 해결해 주었다. 그 경제적인 뒷받침은 밀양에서 만석꾼이었던 선생과 동생의 재력으로 충당하였다.

학교 운영은 같이 망명한 이원식이 담당했는데, 환인 주변의 이주 한인들에게도 단군사상과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한편 박은식, 신채호와 같은 당대 제일의 역사가들을 특별 초청하여 단군에 뿌리를 둔 민족정신과 민족문화를 집필토록 하였다 .

19115월에 서간도로 망명해온 백암 박은식은 윤세용 선생의 집에서 기거하면서 <몽배금태조><천개소문전>, <동명성왕실기>, <발해태조건국지>, <대동고대사론> 등을 집필하기도 하였다. 특히 <몽배금태조>는 대종교 정신을 바탕으로 집필된

책으로 항일 독립투쟁을 위한 정신적인 투쟁사관을 반영하고 있다.

단재 신채호는 동창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면서 백두산을 답사하고 광개토대왕비를 찾았으며 <조선사>도 저술하였다. 대종교의 영향으로 민족의 역사 신앙을 정립하게 된 단재는 대종교의 <단기고사>를 중시하였고 고대사 연구에도 집중하였다.

신채호의 낭가사상은 신라의 국선이 고구려의 선인과 통한다고 생각하고 신라의 화랑은 본래 상고시대 소도재단의 무사로서 당시로서는 선비로 일컬어지던 자라고 보았는데 이러한 사상은 선교와 대종교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러므로 신채호가 주장한 혈전주의의 방략은 대종교의 무장독립운동 방략, 육탄혈전에 의한 독립전쟁론과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단재와 백암의 사학은 국조인 단군을 중심체로 한 민족종교의 필요성을 강조하였고, 이러한 역사관이야말로 지속적인 대일투쟁에 있어 강력한 무기가 되었다. 또한 동창학교의 김진(김형) 선생은 국어 교사로서 주시경의 제자였는데, 이극로 선생은 동창학교에서 김형을 만남으로 인해 한글 연구의 기회를 얻게 되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동창학교는 국사교육·국어교육·군대식 체조와 같은 체육교육 등에 힘썼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국어와 국사를 통해 민족정신 고취에 최선을 다하였다. 그래서 일제는 동창학교를 그냥 두지 않았고, 일본 영사관측에서는 윤세복, 윤세용 형제를 협박하여 폐교를 종용하였다. 그리하여 대종교 독립운동가들은 1914년 무송현으로 옮겨갔다. 무송현에는 이미 백산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을 양성하던 전성규가 있었고, 함께 협력하여 백산학교를 중심으로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선생은 19193·1운동이 일어나자 동지들과 협의하여 한교공회를 조직하여 항일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면서 유하현에서 박장호·조맹선·백삼규·조병준·전덕원 등 대표자 500여 명이 모여 조직한 대한독립단에 가입했다. 19206월 대한독립단 간부 홍주와 함께 무기 운반 작업을 하였고, 1921년 제3국제공산당 동양민족대회에 한교민단 대표로서 손서하 등과 함께 참석하였다. 이보다 앞서 부민단, 한족회 등에 가입하여 교육활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1922년에는 대한통의부에 가담하여 참모로서 손병헌·이장녕·오석영·독고욱 등과 함께 참모부장 이천민, 부감 전덕원 등을 보필하는 활동을 하였다.

선생은 1923년 한국독립군 통합기관으로 임시정부 육군주만 참의부가 결성되자 이에 적극 참여하였다. 1925년에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으로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1926년에 재차 임명되었지만 결국 나아가지 않았다. 1925년 고마령에서 군사 회의 도중 일본군의 습격을 받아 참의부의 29명이 전사하는 대참변이 발생하자 참의부 참의장(1925.8~1927.3)으로 추대되어 부대를 재편성하고 항일투쟁을 계속해 나갔다. 19273월에 참의장을 사임한 선생은 대종교에 입교하고 노구의 안정을 위해 북만주 빈강으로 옮겨 여생을 한결같이 독립운동에 바치다 1940212일 만주 길림성 동홍현 산회가에서 병환으로 영면하였다. 부인 박복택 여사와의 슬하에 영선(英善), 수선(壽善), 장선(章善), 우선(遇善), 창선(昌善-애국장 추서), 정선(貞善) 등 다섯 아들과 4명의 딸이 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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