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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의 독립운동가

참고문헌: 최필숙(2017). 일제 강점기 미리벌의 분노와 희망. 밀양독립운동사연구소 

윤창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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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독립기념관 댓글 0건 조회 483회 작성일 18-09-26 12:32

본문

 

윤 창 선(尹 昌 善)

 

1901.1.22. ~ 1972.12.16.

부북면 무연리 318

만주방면(신민부군자금)

애국장(2010)

 

 

윤창선 선생은 서기 1901122() 밀양시 부북면 무연리(연포마을) 318번지에서 만주에서 활동하며 육군주만참의부의 참의장을 지낸 아버지 백암 윤세용과 어머니 박복택과의 슬하 54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관향은 무송(茂松)이며 이명을 재선(在善)이라 불렸다. 선생의 숙부는 대종교 제3세 도사교를 지낸 단애 윤세복 선생이다.

선생이 11세인 1911년 말에 부친을 따라 만주 환인현으로 이주하였고, 19125월에 환인현 남관 정양가도에서 삼촌인 윤세복 선생과 부친이 함께 세운 <동창학교>에 입학을 해서 공부하게 되었다. 그러나 동창학교는 1913년도에 들어서자 일본 영사관의 회유와 협박을 받은 중국 관헌들에 의해 폐교되어 부득이 학교에서의 수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와 삼촌의 주선으로 형제들과 함께 3여 년 동안 당대 최고의 스승인 고루 이극로, 단재 신채호, 검군 김규환, 백주 김영숙 선생 등으로부터 국어와 역사, 한문, 지리 등을 사사받게 되었다.

수학 후 대종교의 교세 확장 사업을 돕던 선생은 1919년 초에 홀로 귀국하여 대구에 근거를 정하였다. 5월에 경남 진주시 중안동 190번지에 주소를 둔,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인 이갑성의 조카이자 그의 형인 이상하 선생의 여식인 이옥경(李玉瓊)과 결혼하여 대구부 남정 42번지에 신혼살림을 차리고, 처남 이동희와 함께 1922년까지 서점을 경영하였다.

1923년 가족을 남겨두고 다시 만주 영안으로 건너가 매형인 이병묵을 비롯해 동향인인 손호·김홍규 등과 함께 대종교 교인들이 중심이 된 신민부에 가입하였다. 대한독립군단·대한독립군정서를 주축으로 북만주 지역의 독립운동 단체들이 조직한 신민부의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국내를 드나들며 활동하였다.

19274, 신민부 중앙집행위원장 백야 김좌진 장군으로부터 일제 고관과 친일 분자의 주살·주요 시설의 폭파·군자금모집 등의 밀명을 받고, 이병묵·손호·김홍규·손봉현·손량윤·신현규 등과 함께 국내에 들어와 대구·경북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중 마침 서대문형무소를 출감한 사촌 형 윤홍선과 합세하여 군자금을 모으는 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해 나갔다.

192711월 초 밀양군 단장면 사연리에 살던 부자이며, 손봉현의 장인인 김태진을 동지들과 함께 미혹하게 하여 군자금 3,000원을 받아냈다. 이 과정에서 김태진의 아들 김용출을 포섭하여 북간도로 데려가 대종교인으로 만드는 등의 임무를 수행 중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1928731대정 8년 제령 제7호 위반등의 혐의로 체포되었다. 1929925일 경성지법제4차 공판(상소권 포기)을 통하여 5년의 실형을 언도받고 상고를 포기한 채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선생은 형 만기 출옥 후, 193410월에 중국으로 다시 건너가 삼촌이 추진한 대종교 천진전 건립과 대종학원 설립 운영을 보좌하다가 1942년 귀국하였으나 일제의 감시가 삼엄하여 처가가 있는 진주로 거처를 옮겼다. 그러나 처가도 처삼촌인

이갑성의 망명으로 인하여 불령선인 가족으로 낙인 찍혀 장인(李相夏)이 지리산으로 도주하다시피 떠나버려 생활이 궁핍하여 아내의 삯바느질로 겨우 연명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해방이 되자, 귀국하여 다시 대종교 초대 총전교로 취임한 윤세복 숙부 등 여러 분의 주선으로 1951년부터 1957년까지 부산 대신중학교 교사를 지냈고, 1957년부터 1961년까지는 경남중학교 교사로 후학을 가르치다 정년 퇴임하였다. 1962년부터 울산시 성남동 148번지에서 둘째 아들 태호가 모시고 살다가 19721216일 타계하니 향년 72세였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2010년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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