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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의 독립운동가

참고문헌: 최필숙(2017). 일제 강점기 미리벌의 분노와 희망. 밀양독립운동사연구소 

윤치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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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독립기념관 댓글 0건 조회 463회 작성일 18-09-26 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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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치 형(尹 致 衡)

 

1893.9.10. ~ 1968.11.17.

내이동 977(분가899)

의열투쟁

애국장(1990)

 

 

윤치형 선생은 1893910일 밀양시 내이동 977번지에서 윤희선(尹熺璿)3남으로 출생하였다. 선생은 밀양공립보통학교 제1회 졸업생으로 중국에서 활동할 당시 김시화(金時化), 윤추암(尹推岩)이라는 가명을 사용하기도 했다.

1913년 선생을 비롯한 김대지, 황상규 등 20세 전후의 밀양 청년들이 일합사라는 결사체를 조직하였다. 이 단체는 외견상 친목 단체로 위장하고 있었으나 실은 망국의 비애를 통감하고 국권 회복에 청춘을 바치겠다는 비장한 결의를 품은 젊은이들이 조직한 항일 투쟁단체였다. 핵심 인물은 선생을 비롯하여 황상규·김대지·구영필(부산 기장 출신안확(서울 출신, 창신학교 교사이각(=이수택, 경북 칠곡 출신명도석(마산의 실업인) 등이다. 조직적으로 활동하던 일합사는 19183월 초 일제에 발각되어 구영필과 김대지가 평남경찰부에 체포되었고, 명도석 등 다른 회원들도 체포되어 압송되었다. 구영필은 징역6, 김대지는 징역 4월형을 평양복심법원에서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이로 인해 일합사는 조직이 해체되고 말았다.

이후 선생은 19192월 고종 황제의 승하 소식을 듣고, 국운의 쇠망에 망극함을 누를 길이 없어 33일에 있는 고종 황제 인산에 참석하기 위해 석정 윤세주와 함께 서울로 올라갔다.

31일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이 있음을 탐지하고,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33일 인산 대열을 따르며 망국의 슬픔으로 울부짖다 독립선언서를 가슴에 품고 밀양으로 내려왔다.

밀양에 돌아온 선생과 윤세주는 동화학교 교장을 역임한 스승 을강 전홍표 선생을 찾아가 자문을 받고, 선생의 지도로 김병환·이장수·정동찬·정동준·김소지·박소종·박만수·최종관·설만진·윤보은·권재호 등 동지들을 규합하여 윤세주집과 김병환의 가게를 거점으로 313(음력 212) 밀양 장날에 맞춰 독립만세의거를 일으켰다.

일제의 주모자에 대한 검거가 심각해지자 선생은 검거망을 피해 전전하다 윤세주와 함께 압록강을 넘어 만주의 길림에 있던 황상규 선생을 찾아갔다. 일제 경찰은 선생과 윤세주를 체포하지 못하자 미결수로 송치하였다. 1919414일 부산 지방법원 밀양지청에서 궐석재판으로 윤세주 16, 윤치형 6월형을 각각 언도하였다.

19191110일 김원봉을 단장으로 한 의열단 창단 시 선생은 그 자리에 동석하지 못했으나, 바로 뒤에 황상규 선생과 함께 의열단에 참여하고 일제에 대한 적극적인 무력 항쟁에 돌입하였다. 의열단의 투쟁 계획이 19203월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선생은 동지들과 함께 상해로 파견되었다. 상해에서 만들어진 폭탄은 선생이 제공한 300원으로 만들어졌다. 폭탄을 곡물로 위장해서 만주의 안동을 경유, 밀양에 있는 김병환의 곡물상으로 탁송하고, 이종암·황상규·윤세주 등 많은 동지들이국내로 잠입할 때 선생도 함께 서울에 침투하였다. 조선총독부 폭파를 목적으로 서울을 중심하여 일본인의 동정과 각 기관의 내정을 살피던 중 배신자의 밀고로 19206월부터 동지들이 경기도 경찰국 제3부 김태석 일당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윤치형 선생도 황상규·곽재기·윤세주·김병환·신철휴·이낙준·김기득·이성우·김재수 등 16명의 동지들과 함께 검거되었다. 선생은 이수택과 함께 김재수의 집에 숨어 있다 89일 구포에서 동지들에 비해 비교적 늦게 체포되었다.

밀양과 진영에 보관 중이던 폭탄마저 압수되어 의열단의 첫 항일폭파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고 의열단의 중추 단원들이 검거되어 큰 타격을 받게 되었다. 검거된 의열 단원들은 모진 고문을 당하고 192133일에 예심을 끝맺고 공판에 회부되어 1921523일 일심 언도가 경성지방법원에서 있었다. 19216215년형을 선고받은 선생은 5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해방 이후 선생은 1962년 국제신보에 제1차국내폭파사건에 대한 기고를 하였다. 이에 따르면 1920년 여름 영고탑에 있어야 할 구영필이 밀양에 나타나 서울의 동지들이 모두 검거되었다면서 거사 비용은 자기가 댈 테니 남은 동지들이 한 자리에 모여 거사를 의논하자며 집합 일시와 장소를 정하였다고 한다. 이에 윤치형 선생은 구영필에게 무기 은닉처도 가르쳐 주었다. 약속대로 김재수의 사택에 있는데, 서울에서 온 형사대가 급습, 체포되어 부산경찰서로 가니 김태석이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형무소로 옮겨가던 중 윤세주가 비밀 신호를 통해서도 구영필이 우리를 배반하고 동지를 일경에 판 자라 하더라는 것이었다.

출옥한 뒤 끊임없이 청년운동과 신간회 활동을 통하여 일제에 항거하며 지역 사회 발전에도 기여하였다. 1927321일 밀양청년회 제13차 정기총회에서 황상규·윤세주·김병환 등과 함께 신임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53일 당시 사회문제였던 군청이전반대운동에도 앞장섰다. 1211일 신간회 밀양지회 창립 의견을 모을 때 사회를 맡았고, 1219일 정식 창립식에서 서무부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222일의 회의에서는 신간회 본부대회 출석 대표로 선임되었다.

19292월 신간회 정기대회 대표 위원을, 96일 신간회 경남도지회연합 발기준비 대표 위원회의 홍보 담당을 맡았다.

193041일 신간회 밀양지회 제3기 정기대회에서 집행위원(집행위원장 김형달)으로 선임되어 위원장을 보좌하기도 했다.

일평생 독립운동과 청년운동은 물론 사회계몽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던 선생은 해방 후 참의원 의원과 의령 군수를 지냈다. 그 뒤 고향에서 지내다가 19681117일 영면하였으며,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90년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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