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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의 독립운동가

참고문헌: 최필숙(2017). 일제 강점기 미리벌의 분노와 희망. 밀양독립운동사연구소 

이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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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독립기념관 댓글 0건 조회 500회 작성일 18-09-26 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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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병 철(李 丙 喆)

 

1887.5.28. ~ 1925.1.14.

가곡동 367

만주방면(의열투쟁)

애국장(1995)

 

이병철 선생은 1887528일 밀양시 가곡동 367번지에서 부친 이직수(李直秀)와 모친 진남열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이병철(李炳哲)이란 이름을 사용하기도 했는데, 19191110일 길림에서 김원봉을 단장으로 조직한 의열단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의열단은 국내 공작을 위해서 봉천(심양-沈陽)에는 구영필(일명 崔桂華)을 시켜 삼원상회를 개설·운영하고, 서간도 안동(단동-丹東)에는 원보상회라는 미곡상을 이병철 선생에게 맡겨 운영하였다. 다시 말해 이 두 상회를 연락거점으로 삼아 군자금을 마련하고, 무기 반입과 동지들의 도피, 은신처 제공, 국내 출입 안내 등의 일을 맡아 한 것이다.

19203월 의열단의 제1차국내의거인 밀양폭탄사건을 실행할 당시 약산 김원봉의 지시에 의해 곽재기와 이성우, 윤치형 등이 상해에서 중국인으로부터 구입한 폭약과 탄피로 상해 프랑스 조계 보창로 보강리 60호에 있는 김대지 선생의 집에서 폭탄 3개를 만들었다. 이 폭탄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무차장 장건상의 주선으로 안동현 세관에 근무하는 영국인 유스 포인에게 소포로 발송되었다.

영국인으로부터 폭탄 3개를 넘겨받은 이병철 선생은 곡물 자루 속에 폭탄을 숨겨 자신이 경영하던 원보상회를 통하여 밀양에 있는 미곡상을 하던 김병환의 집으로 보냈다. 실제 1차 폭탄 운반 시에 선생은 밀양까지 직접 왔다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운반 당시 선생은 밀양역에서 폭탄이 든 수수가마니를 찾아 김병환 선생의 곡물상회에 직접 운반하였다. 부모 형제가 살고 있던 역 근처의 자신의 집에는 들른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당시 선생의 발걸음은 매우 무거웠을 것이다.

한편 상해에서 김원봉과 이성우 등은 4월 초순 중국인 은익삼으로부터 폭탄 13개를 제조할 수 있는 탄피와 화약, 권총 2, 실탄 100여 발을 구입하여 역시 안동현의 이병철 선생을 경유하여 진영에 있는 강상진의 집으로 보내 배중세가 관리하도록 하였다.

의열 단원들은 상해, 길림, 안동현, 서울 등을 오가며 밀양과 진영에 있는 폭탄을 사용할 거사 준비를 하였으나 배신자의 밀고로 모두 체포되어 제1차 국내폭파의거는 실현되지 못하고 말았다.

선생이 1925114일 길림성 영고탑에서 38세의 젊은 나이로 순국하였을 때에는 이종암을 비롯해서 김백파·최홍기 등 의열 단원들이 장례를 주관하였다.

그리고 192511월에 의열 단원 이종암이 한봉인·고인덕·김병환·신철휴·배중세·이기양 등과 함께 폭탄의거를 계획하고 추진했던 이른바 경북폭탄사건에도 필요한 폭탄을 같은 방법으로 선생이 보내준 것이었다. 이처럼 이병철 선생은 안동현을 거점으로 삼고 의열 단원간의 연락 업무를 충실히 수행하였는데, 선생이 떠난 후 안동현에서 압록강을 건너 국내로 진입하는 일이 대단히 어렵게 되었다고 하는 것을 보면 선생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하였는지 알 수 있다. 이종암이 의열투쟁을 위해 입국하였을 당시 이병철 선생의 집을 방문하여 가족들을 위로하였던 사실을 볼 때 선생의 활동의 위대함과 존재감을 알 수 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95년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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