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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의 독립운동가

참고문헌: 최필숙(2017). 일제 강점기 미리벌의 분노와 희망. 밀양독립운동사연구소 

이상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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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독립기념관 댓글 0건 조회 444회 작성일 18-09-26 12:27

본문

이 상 관(李 相 寬)

 

1890.4.1. ~ 1936.12.16.

부북면 퇴로리 110

만주방면(정의부, 조선혁명군)

애국장(2008)

 

이상관 선생은 189041일 퇴로리에서 태어났다. 선생의 본관은 함평이며, 본명은 이정헌(李禎憲)이다. 이상관이란 이름은 1930년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할 당시에 일제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개명한 것으로 보이며, 이외에도 상관(相官)이나 상관(尙官)을 같이 사용하였다.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한 후 신흥무관학교 재정관리 업무인 재무상(財務相)을 지낸 선생은 19257, 중국 남만주(南滿洲) 환인현(桓仁縣) 일대에서 정의부(正義府) 지방행정부(地方行政部) 환인남구총관(桓仁南區總管)으로서 군비 징수, 군량 축적, 사병 모집에 온 힘을 다하였다. 또한 조선족의 호적, 인구 및 생활상을 조사하여 많은 자금을 모아 재무부에 납부하여 독립군을 확충하는데 이바지 하였다.

1929528일 삼부가 통합되어 국민부가 조직되었고, 그 산하에 조선혁명군이 운영될 당시 선생은 국민부의 재정 및 물자 조달을 주관하였다.

19311217일 국민부의 간부 개선 후 조선혁명군 각 부대 회의를 열어 양세봉을 조선혁명군총사령으로 추대하고 참모장에는 김학규, 국민부 위원장에 김동삼, 재정부장에 선생이 임명되었다.

일제와 위만주국(僞滿洲國) 군경은 조선혁명군이 어려운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활동을 계속 하는 것은 재정부장인 선생의 역할이 있다고 판단, 선생의 체포에 혈안이 되었고, 급기야 선생의 투항을 위해 죄 없는 가족들까지 헌병대에 구금하고 온갖 고문을 가하는 잔혹함을 보였다. 밀고로 피체되어 갖은 고초를 겪던 선생은 19361215일 봉천 북대영(北大營)에서 일제에 의해 피살, 망국의 한을 품고 장렬하게 순국하였다.

1930년대 독립운동 정당인 조선혁명당과 국민부가 영도한 민족주의계열의 독립군 부대였던 조선혁명군은 중국 동북에서 활약한 최후의 민족주의계 독립군이라 할 수 있으며, 그 중심에는 언제나 선생이 있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2008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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