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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의 독립운동가

참고문헌: 최필숙(2017). 일제 강점기 미리벌의 분노와 희망. 밀양독립운동사연구소 

이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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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독립기념관 댓글 0건 조회 521회 작성일 18-09-26 12:12

본문

이 찰 수(李 刹 守)

 

1902.11.12. ~ 1968.2.26.

단장면 구천리 192

3·1운동(단장 용회동만세의거)

애족장(2005)

 

속명이 이차금(李且金)으로 불리워지던 이찰수 선생은 단장면 구천리 소재 표충사의 승려로 191944일 단장면 태룡리에 있던 용회동 장터만세운동을 주동한 사람이다. 그는 당시 17세의 어린 나이였지만 만세운동을 주도하였으며 출옥한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독립운동을 하였다. 일명 태룡 장터만세운동이라 불리던 이 용회동 장터만세운동은 민족 대표의 간접적인 영향을 받고 추진되었다. 민족 대표 중의 한 사람인 한용운은 경성불교 중앙학교 학생 오택언과 지용준을 통도사로 내려 보내 시위운동을 주도하게 했다.

통도사 승려 5명은 320일 표충사를 방문하여 조선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계획하고 44일 단장면 태룡리 장터에서 장날이 열리는 날 만세시위운동을 할 것을 결정하였다.

표충사 승려들이 독립선언서를 등사하고 태극기를 만들어 시위를 준비하고 인근 사찰과 단장면, 산내면, 산외면 등에 시위 계획을 연락하였다. 표충사 강사 및 법무계 책임을 맡은 이장옥은 법무계 서기 김종석에게 선서라는 취지문을 수백장 등사하게 했다.

이찰수 선생은 특히 조선독립만세라는 깃발을 만들어 용회동 장터에 펼칠 수 있도록 준비하는 책임을 맡았다. 장날이 되자 용회동에 있던 장터에는 아침 일찍부터 장꾼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선생을 비롯하여 이장옥·오학성·손영식·김성흡·구연운·오응석 등 시위 주도 승려들은 민간복으로 변장하고 각기 준비물을 감추어 장꾼 속에 숨어 장터로 들어왔다. 미리 연락해 두었던 학생 50여 명에게 독립선언서와 태극기 등을 배포토록 하였다. 정오쯤에는 5천여 명의 남녀노소가 장터에 모여 들었다. 1230분 표충사 승려들이 죽간 끝에 조선독립만세라고 크게 쓴 기를 매달고 나팔 소리를 신호로 구연운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일본의 침략 행위를 규탄하였다.

시위 군중 대열은 독립만세를 부르고 주재소를 향해 돌을 던져 주재소를 완전히 부숴버리고 헌병군조 명화해차(名和海次)마저 짓밟아 버렸다. 밀양 헌병분견소로 부터 헌병이 증파되고 발포를 하자 오후 2시경 시위 군중들은 강제로 해산되었다 .

이찰수 선생 등 표충사 승려들이 주도하고 농민들이 참가한 단장면 태룡리 용회동장터만세운동은 지역운동으로는 대규모의 농민항쟁이었다. 시위 주도자들은 민족 대표의 최후의 신탁을 배반하지 말아야 한다는 격문을 배포하면서 헌병주재소를 완전히 파괴하고 일본 헌병을 때려눕히는 등 전형적인 폭력투쟁으로 발전하였다.

이날 만세운동으로 364명이 검거되고 71명이 검사국으로 송치 되었는데 19191120일 부산 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열린 재판에서 이찰수 선생은 보안법 위반 및 소요죄로 징역 1년을 언도 받고 항소하였으나, 1210일 대구 복심법원에서 김성흡과 함께 징역 2년으로 가중되어 옥고를 치렀다 .

1933824일 오후 10시경 청도역 부근에서 시국 연설을 하려다가 청도경찰서에 검속되어 3일간의 구류처분을 당하기도 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2005년 애족장을 추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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