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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의 독립운동가

참고문헌: 최필숙(2017). 일제 강점기 미리벌의 분노와 희망. 밀양독립운동사연구소 

임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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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독립기념관 댓글 0건 조회 436회 작성일 18-09-26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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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 굉(林 宏)

 

1923.2.12. ~ 1950.10.29.

삼랑진읍 송지리 589

학생운동(대구사범 반딧불)

애국장(2003)

 

임굉 선생은 밀양군 삼랑진면 송지리에서 1923212일에 태어났다. 선생의 본명은 임병찬(林炳贊)이다. 194011월 대구 사범학교 학생의 신분으로 교내 문예부 비밀문예지 [반딧불]을 통해서 독립운동을 펼친 37인 중의 한사람이다.

1941년 대구사범학교에 재학 중 본인의 주동으로 밀양 출신 김영복을 비롯해서 이태길·최낙철·장세파 등과 함께 조국의 독립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떻게든 힘이 되어야 하겠다고 의논하였다. 그 결과, 대구부 동운정 350번지에 사는 학우인 이무영의 하숙집에서 비밀결사체 연구회를 조직하였다.

연구회는 조국독립을 위한 실력배양과 민족의식 고취를 표방하였다. 또한 당시의 국제 정세 분석을 통해 일제의 패망을 예견하고, 회원들 스스로의 실력 양성에 매진함으로써 광복 후 각기 전문 분야의 최고 권위자가 될 것임을 다짐하였다.

이들은 학술 연구를 표방하며 항일의식을 고양하였으며, 비밀엄수, 매월 10일의 연구 발표와 하급생 지도 및 동지 포섭 등의 활동방침을 정하였다. 선생은 교육부의 책임을 맡았다.

19412월부터 3월까지 6차례의 모임을 갖고, 활동방향 등을 논의하였는데, 회원들이 졸업 후에도 장기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사업 계획을 구상하였다. 즉 졸업 후 회원들이 교사로 부임하게 될 것인 바, 우수한 아동들에게 수재교육을 실시하여 독립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한다는 요지였다.

그리고 현지 활동 상황 및 성과를 매월 1 차례 사무원에게 보고하고, 보고사항은 사무원이 종합하여 회원 모두에게 다시 배부키로 하였다.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공문으로 가장키로 하였다.

19413월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한 임굉 선생은 4월에 함경북도 청진에 있는 천마공립국민학교 교사로 부임하게 되었다.

연구회에서 결의를 가졌던 뜻을 일관하고자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앙양하였는데, 19417월 대구사범학교 윤독회 간행물인 반딧불이 일경의 수중에 들어감으로써 대구사범학교 내 학생비밀결사의 전모가 드러나기에 이르렀다.

이로 인해 19431월에 청진경찰서 형사대에 체포되어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는데, 이 때 대전형무소에 수감된 대구사범학교 문예지 반딧불관련자는 임병찬 선생과 김영복 외에 35명이나 되었다.

194328일에 예심이 종결되고, 1130일 대전지방법원에서 있은 최종 판결에서 보안법 위반죄5년형을 언도받고 복역하다 해방을 맞이하여 출옥하였으나 옥중에서 모진 고문의 가혹함으로 건강을 잃고 요절하였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2003년 애국장을 추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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