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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의 독립운동가

참고문헌: 최필숙(2017). 일제 강점기 미리벌의 분노와 희망. 밀양독립운동사연구소 

전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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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독립기념관 댓글 0건 조회 449회 작성일 18-09-26 12:09

본문

전 병 철(全 秉 哲)

 

1926.9.9. ~ 2010.6.12.

하남읍 남전리 193

학생운동

대통령표창(2004

 

전병철 선생은 192699일 옥산(玉山) ()씨 집성촌인 밀양군 하남면 남전리에서 부친 전진한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3세 때 천자문을 배우고 9세 때 하남대사보통학교에 입학할 즈음에는 문중 재실에서 동몽선습, 사략 초권과 천고담, 통감 초권 등을 배웠다. 선생의 호는 동호(東湖)이다.

보통학교 6학년 때에는 검도와 씨름 선수로서 밀양군내 각 학교와 대전에서 우승, 준우승을 하기도 했으나 검도용 죽도로 아동들의 머리를 잘 때리는 사가와(佐川) 교장에게 머리는 사람의 가장 중요한 부위이고 급소인데 죽도로서 제자의 머리를 때리는 것은 애정이 부족한 탓이 아니냐고 항의하여 교장의 그 버릇은 줄어들었으나 이 일로 1주일간의 정학을 당했다.

다음해 선생은 전병국·전병덕 두 종형이 부산상고의 3년 선배로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영향으로 부산상고에 진학하게 되었다.

부산상고 1학년 가을인 19401122일 대중국전의 전력증강을 위한 각 학교 대항 군사 훈련이 있었을 때, 부산 병참기지 사령관 겸 부산상고 배속 장교였던 노다이(乃台) 대좌가 경기의 심판장이었다. 경상남도의 중학생들이 동·서 양 부대로 나누어 모의전투훈련을 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그 날 심판의 불공정으로 일본인에 비해 조선 학생들이 민족차별적 평가를 받았다.

다음 날인 1123경남학도 전력증강 국방경기대회가 부산공설운동장에서 개최되자 노다이는 조선인 학생들에게 부당한 판정을 내렸고 이에 항의하는 조선인 학생의 항의도 무시했다. 이에 동래중학과 부산2상업학교 학생들은 대회 폐회식에서 일본 국기가 내려질 때, 일제히 애국가와 아리랑을 합창했다. 일본천황 만세를 외칠 때에는 !, -!, !’ 등 야유를 보냈다. 식이 끝난 운동장에서는 일본 놈 물러가라! 노다이를 찾아라!”라는 고함 소리가 구덕 언덕에 메아리쳤다.

이 시위에 참가한 학생은 주로 부산상고 학생과 동래중학교 학생들이었다. 학생들은 도청 앞과 대청동을 거쳐 구 부산역에 와서 해산하였으나, 일부 학생들은 영주동에 있던 노다이 대좌의 관사를 습격하여 돌을 던져 대문 전등과 창문 유리 파손 등 상당한 피해를 주었던 것이 소위 노다이사건(乃台事件)’이다.

이 사건은 학생들이 집단적으로 일본의 군사훈련에 반대하여 독립의지를 과시했던 의미 깊은 사건으로 이 운동에 참가한 학생은 1,000여 명이다. 검거된 학생도 200여 명이었고, 15명이 체포 투옥 되었다.

전병철 선생도 영주동까지 따라가 돌을 주워 상급생들에게 공급했다. 이 사건으로 많은 상급생들이 퇴학 또는 투옥되고, 가메야마(龜山) 교장은 함경북도 경성중학으로 좌천되고 구루시마(來島武骨) 교장이 다시 부임해 왔는데, 이때부터 학생들의 사상 동향에 대한 학교의 감시는 점차 엄해져 갔다.

2학년 때인 1941128,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군사훈련과 근로작업은 갈수록 가중되었고, 수학여행은 중지되었다.

4, 5학년 때에는 철도 공장의 철물 정리, 창원군 대산면의 모내기 및 뽕밭 메기, 부두 대두박 콩깨묵 하역작업, 적기 고사포진지 구축 등의 근로 작업을 하였고, 19449월 초순에는 부산상고, 마산상고, 울산농고, 김해농고 등이 울산 비행장 확장 공사의 부수 도로 건설 공사에 2개월간 동원되었다.

부산상고는 비행장에서의 탄약고가 있는 곳까지 도로 건설공사를 맡았다. 처음 1개월분을 배정받아 마치면 또 1개월분을 배정받게 되는데, 일찍 마치면 일찍 귀교 시킨다는 이른바 청부제였다. 과거 각지의 근로 동원에서 몇 번이나 그런 술책에 기만당한 경험이 있는 학생들은 그것을 믿지 않고 적당히 시간만 보내는 태업도 벌였으나 10일간의 추가 작업까지 마치고 11월 초순에 귀교하게 되었다.

194412223개월 단축 졸업으로 모두들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가 직장을 가졌는데, 전병철 선생은 부모에게 효도할 요량으로 집에서 6km 정도 거리에 자전거로 출근할 수 있는 밀양금융조합 수산지소에 1226일 취직을 했다. 그런데 취직 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1945121, 울산경찰서 고등계 형사가 와서 일기장, 편지철, 수필집 등을 압수하고 울산서로 연행해 갔다.

이유는 먼저 구금된 동기생들 중 윤진옥·이용재 등의 진술 때문이었다. 그 진술을 토대로 일본 경찰은 전병철이 일본의 패전이 가깝다. 만주에도 가지 말고, 공군 지원도 하지 마라, 일본이 패전하면 조선은 독립될 것이다.’라고 말했다는데 사실이냐? 울산비행장 근로 작업 때에도 전병철이 주동이 되어 태업을 일삼고 난동을 부렸다고 했는데 사실이냐, 또 일본 성전 수행에 비판적이냐? 무슨 책을 읽고 무슨 서클에 들었느냐, 배후 인물이 누구냐는 추궁과 함께 심한 고문을 했다.

유치된 지 4개월 반인 62치안유지법 위반혐의로 부산 검사국으로 송치되어 부산형무소 미결감방에 구류되었다가 광복을 맞이하여 816일 석방되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2004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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