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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의 독립운동가

참고문헌: 최필숙(2017). 일제 강점기 미리벌의 분노와 희망. 밀양독립운동사연구소 

전홍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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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독립기념관 댓글 0건 조회 491회 작성일 18-09-26 12:08

본문

전 홍 표(全 鴻 杓)

 

1869.12.2. ~ 1929.7.7.

내이동 928번지

국내항일

건국포장(2018)

 

을강 전홍표 선생은 밀양 지역 독립운동가 제1세대로 김대지, 손일민, 황상규 등 제2세대의 스승 역할을 한 사람이다 .

선생의 관향은 정

(旌善)이며 자는 문소(文素), 호는 을강(乙江)이다. 본명은 인()이며 1869122() 밀양면 내이동 928번지에서 아버지 전계진(全桂軫)과 어머니 연일(延日) 정씨의 차남으로 출생하였다.

선생은 양반가의 자제로서 일찍부터 한학을 공부하였고, 조선시대 사마소 후신이자 밀양 유림의 상징적 공간인 연계소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을사늑약 이후에는 전직 궁내부 주사출신인 박상일과 공모하여 선생이 연락책을 맡아 의병진을 구성하는 등 의병항쟁을 준비하기도 했다.

광무년간(1897~1907)에는 밀양읍 내일동에 소재한, 조선시대 밀양의 군무를 관장하던 옛 군관청(軍官廳, 현 밀양 택시) 자리에 동화학교를 설립하였다. 교장인 선생은 새로운 지식을 통하여 청년을 교육하고 자주독립의 애국사상을 고취해 항일투

사를 육성하는 민족지사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선생은 동화학교 학생들을 지도하여 연무단을 조직케 하고,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을 배출하였다. 특히 김원봉·윤세주·최수봉·김상윤·김소지·박소종·정동찬 등에게 빼앗긴 국토를 다시 찾고 잃어버린 주권을 회복하기 전에는 우리는 언제나 슬프고 비참하다. 그러기에 우리의 목숨이 살아 있는 동안은 강도인 일본과의 투쟁을 한시도 게을리 할 수 없다. 미래는 너희들의 것이다. 너희들이 분기하지 않고, 대체 누가 조국광복의 대업을 이룰 것이냐라고 훈시하며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교육을 펼쳤다. 이러한 배일사상교육이 일제로부터 미움을 받아 동화학교가 법인이 아니라는 이유를 붙여 일제는 강제로 폐교시켰다. 당시 학생이던 김원봉과 윤세주 등은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폐교되었다고 생각하여 고사리 같은 손으로 80원의 돈을 모아 선생께 드린 적이 있었다. 그 때 선생은 경제적 어려움보다 배일사상때문이라는 답을 학생들에게 하였을 만큼 선생은 반일사상을 학생들에게 강조하였다. 이로 인해 그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이 항일투쟁에 적극 앞장서게 되었다.

19193, 고종의 인산에 참가하였다가 파고다공원에서의 독립선언서를 소지하고 돌아온 제자 윤치형과 윤세주가 밀양에서 만세의거를 펼칠 것을 선생과 협의하자, 이들로 하여금 동지들을 규합하여 밀양만세의거를 거사하도록 지도하였다. 만세의거 이후 주동자 윤치형, 윤세주 등 제자들과 함께 일경의 검거망을 피해 북간도로 잠시 망명하였다.

간도로 건너간 선생은 한시도 조국광복을 위한 마음을 잊지 않았다. 191941(음력 31), 정확한 지명을 알 수 없는 백두산 자락에서, 나라를 잃은 조선 유민의 한 사람인 자신의 피눈물 나는 심경을 글로 적어 하늘에 고()한 고천문(

天文)을 남겼다. 이 고천문은 대단한 명문장으로 선생의 심경이 그대로 담겼다.

1921년 초, 조용히 밀양으로 돌아와 정세를 살피고 있던 중 선생은 제자인 수봉이 19201227일 밀양경찰서 폭파의거로 인해 피포되어 192178일에 대구형무소에서 사형을 당하였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에 밀양청년회 회원 30여 명과 함께 최수봉의 유해를 인수받아 고향인 상남면 마산리 공동묘지에 장사지내도록 지도하고, 그의 유족을 돕기 위해 조의금을 모금(6550)하였다. 이에 일제는 선생을 1921718일 부령 제160호 및 기부금 모집 취제 규칙 위반 및 사형당한 자에게 동정하고, 반역사상을 칭찬하였다는 죄명으로 기소하였다.

1929811(-77) 내이동 자택에서 61세를 일기로 타계하니 밀양의 청년들이 함께 사회장 형식으로 장례를 치루면서 유택을 밀양시 교동 추화산 서편 구대곡 안에 모셨다. 현재 선생과 박씨 부인의 합분 묘소는 매년 밀양향토청년회 회원들이 벌초를 하는 등 그의 뜻을 이어가고자 노력하고 있다.

선생은 부인인 밀성 박씨(朴象鎬)와의 슬하에 3(一岳, 二岳, 三岳)만 두었으므로 형 상표(象杓)의 삼남인 철준(喆俊)을 양자로 정하였다. 선생의 생전에 철준이 일본에 살면서 귀국하지 않아 양자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못하였으나 선생의 사후에

귀국하였다. 그러나 선생의 독립운동에 관여한 행적 때문에 일제로부터 예비 검속 등 온갖 고초를 당하자 정신병을 얻어 밀양강에서 익사하여 직계 후손이 없어 더욱 안타깝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201831월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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