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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의 독립운동가

참고문헌: 최필숙(2017). 일제 강점기 미리벌의 분노와 희망. 밀양독립운동사연구소 

정동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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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독립기념관 댓글 0건 조회 372회 작성일 18-09-26 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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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동 준(丁 銅 俊)

 

1897.8.21. ~ 1944.10.11.

내이동 954

3·1운동(3·13밀양만세의거)

대통령표창(2015)

 

정동준 선생은 내이동 954번지에서 정경복(丁璟馥)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고종의 인산에 참여하였다가 191931일 파고다공원 만세 현장에서 독립선언서를 획득하여 밀양으로 돌아온 윤세주와 윤치형이 동화학교 교장을 지낸 전홍표 선생을 찾아가 서울에서의 만세시위 상황을 설명 드렸다. 을강 선생님의 지도를 받아 또래의 동지들과 여성 기독교인을 규합하여 밀양에서도 독립만세시위를 할 것을 의논하여 준비를 시작할 때 처음부터 가담하였다.

동지들과 함께 밀양면 사무소와 부북면 사무소의 등사판을 밤에 몰래 훔쳐내어 아북산으로 올라가 병풍을 둘러 불빛을 가리고 독립선언서를 밤새워가며 수천 매를 등사하였다. 그리고 김시악(백민 황상규의 부인이복수(고인덕의 부인), 김영수(전 예총밀양지부장 안영의 조모) 등 대부분의 여성 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윤세주의 집에서 2~3일에 걸쳐 태극기를 수백 매 만들어 윤세주의 집과 밀양 장터 옆에서 쌀가게를 하는 김병환의 집에 숨겨두었다. 313(음력 212) 밀양 장날

만세시위를 결정하고 인근 부락에 사는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에게 비밀리에 연락을 취하였다.

당일 선생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각기 준비된 물품을 품속에 숨기고 밀양공립보통학교 앞 밀양 장터에 모인 천여 명의 군중 속으로 파고들어 오후 130분경 조선독립만세라고 크게 쓴 기를 군중 속에 펼쳐 세웠다. 윤세주가 높은 곳에 올라서서 독립선언서를 큰 소리로 읽어 나가는 동안 정동준 선생을 비롯한 18명의 동지들과 여성 기독교인들은 독립선언서를 뿌리고 태극기를 나누어 주었다.

윤세주가 독립선언서 낭독을 마치고 두 손에 태극기를 움켜쥐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치자 중간 중간에 끼어 있던 동지들을 위시하여 수천의 군중들이 태극기를 휘날리며 조선독립만세를 함께 외치니 밀양공립보통학교 앞 장터는 만세 소리로 떠나갈 것만 같았다.

만세를 부르는 군중들은 열광하여 앞장선 큰 깃발을 따라 거리를 누비며 시위행진을 하자 밀양 거리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시위대 중 일부는 밀양공립보통학교로 들어가 만세 함성을 지르기도 했다.

밀양에 주재하고 있던 10여 명의 헌병과 경찰병력이 총칼을 휘두르며 군중을 해산시키려 하였으나 부산의 일본 헌병수비대 병력이 급파되어 가까스로 진압하였다. 군경의 무자비한 총칼 앞에 결국 시위대는 해산되고 만세 시위 주모자들은 검거 되었다. 정동준 선생도 연행되어 고문을 당하고 재판에 회부되었는데 1919414일 부산 지방법원 밀양지청에서 진행된 재판에서 보안법 위반의 죄목으로 징역 6월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19191014일 부산형무소에서 출소했다.

선생은 192996일 밀양신간회지회 제2기 임시대회(황상규 지회장에서 김형달 지회장으로 교체) 당시 동지 권중화와 함께 집행위원으로 선임되어 신간회 활동에 몸을 담기도 했다 .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201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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