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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의 독립운동가

참고문헌: 최필숙(2017). 일제 강점기 미리벌의 분노와 희망. 밀양독립운동사연구소 

최수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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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독립기념관 댓글 0건 조회 518회 작성일 18-09-26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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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수 봉(崔 壽 鳳)

 

1894.3.3. ~ 1921.7.8.

상남면 마산리 792-3

의열투쟁

독립장(1963)

 

수봉은 자()이고, 호적상의 이름은 경학(敬鶴)이다. 그러나 수봉이라는 이름이 널리 알려져 경학이라는 이름으로 된 공식문서에서 의사를 찾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최수봉 의사는 189433일 밀양군 상남면 마산리 792-3번지에서 태어났다.

천품이 영특하고 기상이 뛰어났으며 소년시절부터 향학의 열성이 남달랐다. 한문 서당을 거쳐 1905년에 밀양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이후 의사는 일본인 교사가 조선 역사를 가르치던 중 한민족의 시조인 단군을 일본의 스사노오노 미코토(素盞鳴尊-대화족의 시조로 추앙되는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昭大神의 남동생)의 아우라고 말하자 두 인물의 생존 연대기가 전혀 이치에 맞지 않아 구두시험 때 소잔명존은 우리나라 단군의 중현손(重玄孫)에 해당한다고 답했다. 이에 일본 왕실 모독죄를 범한 불온분자로 낙인 찍혀 퇴학을 당했고, 그 후 동화학교에서 전홍표 교장의 가르침을 받았다.

의사는 일본 놈들의 강압에 의해 동화학교가 폐교되자 1912년 동래 범어사 안에 있던 명정학원으로 학적을 옮겨 졸업하였다. 쫓겨 다니며 학교 공부를 마치고 밀양으로 돌아온 최의사는 모교의 폐허를 돌아볼 때마다 망국의 서러움이 더욱 북받쳐 올랐다.

그 후 의사는 평안북도 창성군에 있는 사금광에 날품팔이로 들어가 생활하고, 평안북도 정주우체국 우편집배원 생활도 하다가 고향에 내려왔다. 1918년 고향으로 돌아온 의사는 고향 마산리에서 서당 훈장을 하였는데, 제자로는 강기수, 이인제, 김명헌 등이 있다.

이후 19191110일 밀양인을 중심으로 조직된 의열단의 제1차 암살파괴의거 시 밀양으로 왔던 이종암과 김상윤, 한봉근이 최수봉 의사를 만나게 되었고, 이때 고향 친구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는 의열단에 가입하게 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9201227일 오전 930분 경, 밀양경찰서장 와타나베 스에지로(도변말차랑)가 서원 19명을 청 내 사무실에 모아놓고 훈시를 하고 있을 때, 현관을 통해 경찰서 안으로 들어가 남쪽 창문에서 약 6척 정도 떨어진 지점에서 사무실 안에 도열해 있던 서원들을 향해 최수봉 의사가 폭탄 1개를 힘껏 던졌다. 폭탄은 유리창을 뚫고 들어가 도순사 부장 쿠스노키 게이고(남경오)의 오른쪽 팔에 맞아 가볍게 굴러 떨어져 불발로 그쳤다. 경찰서 안은 아수라장이 되고 순사들은 범인을 체포하기 위해 현관으로 달려 나갔다. 그 때 최수봉 의사는 쏜살같이 현관 앞으로 와서 뛰어나오는 순사들을 향해 두 번째 폭탄을 던졌다. 폭탄은 복도 바닥에 떨어지며 폭음과 함께 작열하였으나 성능이 세지 못해 근처에 있던 서류함 등만 약간 파손시켰을 뿐 큰 피해를 주지 못했다.

의사는 경찰이 추격해 오자 밀양성 서문 쪽을 향하여 달아나다, 도주로 골목 안에 있던 황석(黃錫-黃石)의 집안으로 들어가 자결하기 위해 칼로 목을 찔렀다. 절명하기 직전 경찰들이 제등의원으로 긴급히 후송하여 응급 치료를 서둘렀고 부산에 있던 도립병원에 억지로 이송, 입원시켜 2주일 정도 치료를 시킨 뒤 심문을 하였다. 의사의 상처는 길이 2, 깊이 1.5cm였다.

최수봉 의사의 건강이 조금 회복되자 부산 지방법원 검사국의 취조를 거쳐 공판에 회부되었다. 공판 과정에서 부산 지방법원의 아오야마(靑山) 1심 재판장이 부산 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박재혁이나 남대문 사건의 강우규를 너는 잘 알고 있지 않느냐? 너는 죽을 줄 알면서 왜 이런 짓을 저질렀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최수봉 의사는 태연하게 재판장을 비웃으며, “내 그때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죽으려고 하지 않았더냐 너희 놈들을 보지 않으려고 했는데, 왜 죽지도 못하게 하고 이 야단들이냐고 재판장을 향해 고함치며 분을 참지 못했다고 한다.

부산 지방법원에서는 무기징역을 언도 받았지만 검사가 이에 불복하고 대구 복심법원에 상소하여 1921416일 대구 복심법원 형사 2부에서 마에사와(前澤成美) 재판장으로부터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굴하지 않고, 경성 고등법원에 상고하였으나 1921523일 기각 판결을 받고, 192178일 오후 3시 대구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의사는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교수대에 올라 교수된 지 13분만에 절명하니 그때 나이 28세였다 .

최수봉 의사는 갖은 고문과 악형에도 불구하고 동지를 지켜내고 더 많은 희생을 막기 위해 허구의 인물을 만들어내고 소설 쓰듯 상황을 지어내면서 누차 진술을 번복하여 수사에 많은 혼선을 초래하게 만들었는데, 이는 그의 뜨거운 동지애와 남다른 희생정신의 표출로 보인다.

의사는 본래 밀양청년회 회원이었기 때문에 친구가 많았을 뿐만 아니라 그의 사상에 공명하는 자가 적지 않아 교수형이 집행되던 78일 밤 전홍표 선생을 비롯해 밀양청년회 사무원인 한인수, 회원인 박임수, 하경용 등 청년 회원 30명이 동네 청년 회관에 모여 최수봉 의사의 장례와 관련한 여러 가지를 의논하였다. 최의사의 시신을 전체 청년 회원이 밀양역에 나가 맞이하는 일과, 또 전홍표 선생이 제의한 유족을 위로하기 위한 조위금 모집을 결정하였다. 한인수·박임수·하경용·박길수 등의 회원들이 당국의 허가도 받지 않은 상황에서 부의장을 지참하고 모금에 참여하여 밀양청년회 회장 이성희 외 30여명으로부터 6550전의 기부금을 모집하였다.

최수봉 의사가 사형당한 밤에 청년회 덕육부원인 박상오와 총무 김래봉 등 2명이 의사의 시신을 운구하기 위하여 대구형무소로 올라가 다음 날 손수 호송하여 왔다. 김래봉은 시신이 장지인 상남면 마산리 공동묘지에 다달았을 때 기도를 올렸다는 이유로 밀양 경찰서에 검거되었다. 이 두 사람을 포함하여 사건에 가담된 30명 모두가 검거되었다. 부산 지방법원 검사국 노다(野田) 검사에 의해 ‘1920년 부령 제160호 및 기부금 모집취제규칙 위반 및 사형 당한 자에게 동정하고 반역사상을 칭찬 하였다.’는 죄명으로 취조를 받아 718일에 전부 기소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동아일보1921.8.2.1.)

의사가 자결하기 위해 황석의 집에서 목을 찔렀을 때 입고 있었던 피 묻은 저고리가 1960년대까지만 해도 백민 황상규 선생의 아들인 황만용(당시 밀양교육장, 73~76년까지 재직)에 의해서 학생들에게 보여줘 교훈이 되었으나 이후 이 혈의(血衣)의 행방을 알 수 없어 안타깝다.

최의사가 보여준 살신성인의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해 그의 고향 마을 입구에 그를 기리는 추모비가 건립되었고, 매년 78일에 추모제를 거행하고 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3년 독립장을 추서하였고, 상남면 마산리 공동묘지에 모셔져 있던 선생의 유해는 19691020일에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장군묘역에 이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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