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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의 독립운동가

참고문헌: 최필숙(2017). 일제 강점기 미리벌의 분노와 희망. 밀양독립운동사연구소 

강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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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독립기념관 댓글 0건 조회 1,258회 작성일 18-09-26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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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덕 수(姜 德 壽)

1904.7.9. ~ 1938.6.7.

내일동 254

3·1운동(밀양소년단만세운동)

건국포장(2004)

 

1904년 밀양시 내일동 254번지에서 태어난 강덕수 선생은 강윤길의 3남이며, 바로 위의 형은 의열단원이었던 강인수 선생이다. 밀양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밀양소년단 단원이었던 선생은 3·1운동 당시 15세의 소년으로 41, 같은 학교 졸업생인 윤차암·윤수선·김성선·박소수 등과 함께 밀양면(, 밀양시) 내일동의 아동산으로 갔다. 이 때 부산 제2상업학교에 진학한 윤수선으로부터 부산에서 학생들이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밀양에서도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만세운동을 전개하자고 제의하였다. 이들은 밀양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을 규합하여 42일 밤에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같은 학교 졸업생인 정선호의 집에 들러, 만세시위 계획을 설명하여 함께하기로 결의하였다. 여섯 사람이 함께 주도하기로 하고 윤차암은 밀양공립보통학교 졸업생 중에 밀양소년단 단원을 대상으로 시위 계획을 전달하고 소집하는 책임을 맡기로 하였다. 42일 저녁 식사 후 9시경, 시위주동자 윤수선 등과 시위 연락을 받은 밀양공립보통학교 학생 40여 명이 모이자 농업에 종사하던 박차용(朴且龍)도 가세하여 나팔을 불며 시위대의 선두에 섰고, 강덕수 선생과 다른 학생들도 박차용의 뒤를 따라 무안가도(, 점필재로)로 행진하였다. 무안가도에서 윤차암 등이 합류하여 북문까지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에 감명을 받은 시민들이 함께 독립만세를 외쳐 밀양 천지를 뒤흔들었다. 급히 출동한 경찰과 헌병의 무력 제지로 시위하던 50여 명은 해산 당하고 주동한 소년 14명이 검거되었다.

이들과 함께 일경에 체포된 선생은 191955일 부산지방원 밀양지청에서 열린 재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 받았다. 이후 1920421일 부산지방법원 밀양지청의 재판에서 윤차암 징역 6, 박소수 징역 4, 윤수선·김성선·강덕수 징역 9, 정선호 징역 7월로 형이 변경되었다.

이후 선생은 밀양소년단 활동과 밀양청년회 등에 참여하여 활동하였으며, 19242월 서문 안 교회에서 개최된 밀양신년대강연회에서 밀양소년단 간부 자격으로 김경준의 취지 설명에 이어 자유적 생활이란 강연을 하였다. 19251118일 개최된 밀양청년회의 밀양청년연맹 조직 관련 가결 시에는 윤상준, 인용성과 함께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271219일 밀양청년회관에서 제1회 정기대회를 개최해 신간회 밀양지회가 창립되었을 때, 윤치형·박임수·윤세주·정광호·김병환·황상규·안병희·윤상준·박병기·한일근·김희지·이건희·조용숙·이종하·안준 등과 함께 16인의 창립 위원으로 선정되어 서무부서의 일을 맡아 활동하였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2004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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